드라마

직장의 신 - 마치 가족처럼, 무정한의 기억이 미스김의 상처와 만나다.

까칠부 2013. 5. 7. 08:44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미스김(김혜수 분)에 대해 다 안다는 듯 친절한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는 무정한(이희준 분)의 모습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미스김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기껏해야 고정도(김기천 분) 과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섣부르게 멋대로 단정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말이다. 무엇보다 미스김 자신이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문뒤에 숨어서 미스김의 바지 아래 감춰진 다리를 훔쳐보려는 장규직(오지호 분)과 무정한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을 것이다. 굳이 보여주기 싫어서 바지로 가리고 다닌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바지차림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 테고, 따라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굳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에는 이유를 묻는 것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미리 예단하고, 미리 단정짓고, 그렇게 미리 결론내리고.

 

사람 사이에 가장 큰 오해는 대개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데서 시작된다. 자신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어도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텐데, 그같은 착각이 확신이 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는 차라리 상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된다.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럴 줄 몰랐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그래서 미스김이 감추고 있던 다리를 보았고, 다리의 상처를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 알아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과연 무정한이 미스김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미스김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미스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가장 흔하게 쉽게 범하고 마는 실수들일 것이다. 서로는 타인이다. 남이다. 내가 아니다. 우리일 수는 있어도 나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서로가 독립된 주체적 존재로써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오롯한 자신만의 거리다.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영역이다. 모든 상처와 아픔과 절망과 좌절까지, 모든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과 당연한 일상들에 대해서도. 하지만 가족이라 한다고 진짜 가족이라 여긴다. 가족조차 함부로 넘으려 해서는 안되는 선을 너무 쉽게 넘어서 버린다. 상대를 위해서. 정확히는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단지 미스김이 고집하는 바지차림 아래 감춰진 다리를 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그만큼 상대를 생각해주니까. 내가 그만큼 상대를 배려해 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상대도 자신에게 그만큼 해주기를 바란다. 무정한과 같은 타입이 직장상사가 되면 그래서 매우 피곤해진다. 이미 지난주 고정도 과장과 관련해서 그같은 모습이 일부 보이고 있기도 했었다. 고정도 과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선의로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업무와는 상관없는 고정도 과장의 영어숙제를 대신해주도록 미스김에게 부탁한다. 미스김의 말처럼 가족같다는 말은 가족과 마찬가지로 댓가없는 헌신을 의리에 기대어 강요한다는 말과 같은 뜻일 수 있는 것이다. 월급이 몇 달 째 밀리고 있는데도 회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계속 다니라. 회사를 생각해서 수당없는 잔업과 야근도 얼마든지 받아들이라.

 

신랄하다. 필자 역시 그런 회사에 잠시 몸담아 본 적이 있었다. 어떠한 부당한 대우도 참아야 한다. 적은 급여와 과다한 노동과 그리고 불합리한 인간관계까지도 마땅히 인내하고 관용하며 너끈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다.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돈을 밝혀서도 안되고, 편하려고만 해서도 안되고, 자신이 아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적게 받고 더 많이 더 열심히 자발적으로 일하라. 그리고 회사가 나가라 하면 군말 않고 나가주라. 의욕에 들떠있는 사회초년생들이 쉽게 빠져드는 함정이기도 하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라. 굳이 회사를 먼저 배려하여 양보하거나 희생하지 않더라도 회사가 요구하는 일만 충실히 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는 회사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굳이 회사동료들과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회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남은 일이야 어찌되었든 자기 일만 확실하게 끝냈다면 먼저 퇴근해도 상관없다. 미스김 자신처럼. 그것이 미스김이 회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 미스김은 도대체 얼마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는 것일 게다. 직장을 자기 집처럼, 동료를 자기 식구처럼, 계약직은 정규직이 되어 지금의 직장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수 없으니까. 불가능한 것이다. 미스김처럼 몇 개인지도 모르는 자격증을 일일이 따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면 업무외라 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프로 이상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비로소 미스김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의 신>이다. 신이란 인간의 인지 밖에 있는 단지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판타지인 것이다. 미스김은 현실에 없다.

 

아무튼 서로의 감춰진 문을 애써 두드리려 하는 사이 어느새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만다. 장규직이 금빛나(전혜빈 분)를 떠난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자살하고, 채권자들에 의해 모든 재산을 차압당하고, 대학은 커녕 당장 살기 위해 막노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궁지에 내몰렸다.

 

그래도 한때나마 연인이었는데 더구나 장규직과 같은 '남자'가 그런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여자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자기에게로 향해질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상대의 화려한 배경에 일방적으로 기대고 싶어지는 자신의 나약함을 과연 그는 견딜 수 있었을까? 굳이 금빛나에게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먼저 멀어지고 만 것인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장규직으로 하여금 금빛나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차라리 몰랐다면 아프지나 않았으련만. 아니 알았기 때문에 금빛나도 이제는 장규직에 대해 포기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미스김의 다리의 상처와 무정한의 지나쳐간 과거가 만나고 있었다. 6년 전 그곳에 무정한도 있었다. 비극의 순간 비극의 반대편에서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아직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과연 그곳에서 무정한이 맞닥뜨리게 될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그같은 과거의 진실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정주리(정유미 분)의 캐릭터는 이 시대 취업에 고달파하는 젊은 군상들 그 자체일 것이다. 이번에는 취직을 못해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안타까운 사정이 보여지고 있었다. 서류심사에서 이미 탈락하여 언제 취직이 될지 기약이 없는 정주리를 옛남자친구는 가차없이 차버린다. 여성의 경제력도 이제는 중요하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일정한 수집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장차 살아가는데 어려움도 적을 것이다. 시대가 그러한데 의리를 지키겠다고 취직의 가망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와 계속해서 사귄다는 건 무슨 의미이겠는가. 연애는 판타지일지라도 결혼은 현실이다. 동정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불쌍한 캐릭터일 것이다.

 

된장학교 체험교실에서의 에피소드는 일본의 원작을 의식한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인 미스김에게 탈을 씌울 필요가 있었다.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역시나 일본산 귤은 한국에 와서 한국산 탱자가 되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마저 우울한 현실로 빠져버리고 만다. 계약직의 현실이 우울한데 계약직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마냥 밝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미스김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스김의 다리에 난 상처와 그 일과의 관계란 또한 무엇일까? 무엇이 미스김을 저토록 강하게 구속하고 있으며, 무정한이 그날 그곳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원작에서는 사소하게 짧은 나레이션만으로 넘어간 부분이었을 테지만, 바로 우리들 자신이 살고 있는 비정한 현실일 것이다. 미스김으로 하여금 울게 하고 다시 울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자신을 향한 족쇄인 것이다.

 

미스김의 존재가 갈수록 애닲아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애닲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스김의 당당해지려는 모습이 오히려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현실이 애처롭기 때문일 것이다. 웃을 수만 없지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내일을 기다린다.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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