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와 지금의 현재, 고통스러운 과거의 진실과 풍요와 안락이 있는 현재의 행복, 과연 자신이라면 이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준영(하석진 분)은 지나칠 정도로 자상하고 배려심깊은 훌륭한 남편이다. 오준영과 함께 있을 때 조해우(손예진 분)는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 고통스럽기만 한 한이수(김남길 분)의 과거를 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 진실은 과거에 있지만 행복은 현재에 있다. 마지막 순간 과연 조해우의 선택은 무엇이겠는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의도한 것이었을 게다. 하필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그런 만큼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를 드라마의 서사적 소재로써 채용하여 쓰고 있다. 흔히들 하는 말이다. 과거의 역사가 무에 중요한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갖는가. 중요한 것은 현재다. 그리고 미래다. 불편한 과거는 잊고 오로지 행복한 미래만을 생각하며 나가자.
쉽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오준영과 한이수 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묻는다면 답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한이수의 다른 이름인 요시무라 준은 자이언트 호텔이라고 하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호텔체인의 사장이다. 서울중앙지검장의 아들이며 뛰어난 수완으로 벌써부터 가야호텔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오준영에 비해서도 결코 꿇리지 않는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한이수가 요시무라 준이치로(이재구 분)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사고의 후유증까지 앓고 있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의 가난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더라도 과연 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미화되어도 추억은 흘러간 과거일 뿐이고 현재의 행복은 지금 자신이 직접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를 돌이켜봐야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과거의 진실을 파헤쳐 책임을 묻고 죄를 물어봐야 지금에 와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는 더 불편해지고 불행해진다. 그것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장 확실한 당장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당장의 풍요와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는 쪽이 보다 자신을 위하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아마도 사람들은 현명하다 영리하다 말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득(이정길 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준영의 아버지 오현식(정원중 분)과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를 묻지 않는다. 지나간 과거는 묻어둔다. 지금만 생각한다. 앞으로만 생각한다. 지금 당장 자신들이 쌓아올린 부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과거만 묻지 않는다면. 누군가 굳이 과거의 진실을 캐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조상득과 오현식의 지금에 영향을 받는 주위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조해우가 법의 정의를 실천해야 할 검찰의 선배로써, 더구나 서울중앙지검장이라고 하는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상관이기도 한 오현식에 대해 이해한다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은 누구나 현재에 살고 있다.
그래서 한이수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실수야 말로 가장 완벽한 계획일지도 모른다고. 한이수 역시 현재에 살고 있다. 현재의 한이수는 요시무라 준이치로의 양아들이며 자이언트 호텔의 사장이기도 한 요시무라 준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이름이며, 은인이기도 한 요시무라 준이치로의 복수를 대신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를 위해 그는 철저히 계산하고 계획한대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의 머리가 시키는 것이다. 복수라는 당위를 위해.
한이수가 굳이 요시무라 준이 된 이유였을 것이다. 요시무라 준은 한이수의 현재다. 요시무라 준이치로의 복수마저 더해진 복수가 당위가 되어 버린 지금의 그인 것이다. 그에 비해 한이수라는 이름은 조해우와의 아름다웠던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만이 한이수라는 이름을 공유한다. 조해우와 오준영과 김동수(이시언 분)와 동생 한이현(남보라 분)과, 그리고 이번에 아버지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아직까지 가슴에 품고 있는 박여사(정경순 분)이 더해지고 있었다.
지금의 요시무라 준이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아름다웠던 시절의 한이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고 있다. 복수를 계획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요시무라 준의 이성이라면,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조해우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은 다시 한이수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감정에서 비롯된 충동이었던 것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차라리 자신을 학대하듯 필사적으로 벼려낸 이성도 그의 본능에 간직된 순수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요시무라 준이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위해 조해우를 이용하는 한 편에서 한이수라고 하는 이미 지워버린 이름은 조해우를 통해 그리운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하기는 그래서 조상득도 오현식도 정작 자신들의 계획에서 벗어난 조해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해우의 할아버지란 어쩌면 조상득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죄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것들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자신만이 아닌 아들과 손녀까지 모든 것을 잃어야 할 지 모른다. 오현식도 역시 그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며느리인 조해우 앞에서 그는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그는 차라리 뻔뻔해지려 한다.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며. 양심은 마음에 있지만 핑계는 머릿속에 있다. 길들여진 이성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의 소리마저 능숙하게 속이고 만다.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한이수에게나 조해우에게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것을 한이수도 안다. 조해우도 안다. 하지만 과거의 족쇄를 풀어야 그들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비로소 현실을 현실로써 받아들일 수 있다. 오준영이 조해우의 남편이다. 조해우는 이미 오준영의 아내다. 한이수 역시 요시무라 준으로써 살아온 시간들이 있다. 다만 과거의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고 현재로 이어진다. 그는 한이수며 또한 요시무라 준이기도 하다. 한이현이 친아버지인 한영만의 딸이면서 또한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형사 변방진(박원상 분)의 딸이기도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이수가 요시무라 준이 되고 요시무라 준이 한이수가 되기 위한, 제대로 과거를 현재로 잇고 미래오 잇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나간다.
절묘하다. 전혀 악하지 않다. 오히려 선하다. 누구보다 선한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행복한 자신에 설득당하고 만다.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지금의 행복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조금씩 그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과거의 한이수란 아프기만 할 뿐이다. 더구나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더 큰 절망과 고통이 그녀에게 닥치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그녀는 올곧다. 무지의 탓일까?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선택이란 무엇일까? 드라마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한이수가 그녀를 기다린다.
역시나 한이수가 조해우에게 건넨 단서에는 한이수의 존재를 알리는 과거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조해우와 한이수와 만난다. 죽은 줄 알았던 한이수와 비록 기억의 흔적으로나마 다시 해후하게 된다. 비극은 시작된다. 비극인 동시에 모든 비극을 해결할 열쇠이기도 하다. 선택의 순간은 다가온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웃고자 한다면 눈물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은 가볍지 않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서 한이수가 돌아온다. 현재에도 요시무라 준이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현재를 살면서도 한이수는 과거를 꿈꾼다. 오준영은 조해우의 현재다. 시간을 거스른다. 같은 공간에서 한이수와 조해우는 시간을 거슬러 만난다.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무겁다.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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