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이수이던 자신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한이수가 아니었다. 요시무라 준이었다.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며 돌아온 김준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한이수조차 그에게는 단지 복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거미줄이었을 것이다. 조해우(손예진 분)이라고 하는 나비를 유인하기 위한 거미줄. 그리고 조해우는 다시 조상국(이정길 분)이라고 하는 흉폭한 짐승을 잡기 위한 미끼였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아끼는 손녀에 의해 자신의 죄가 낱낱이 밝혀지고,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상국은 한이수(김남길 분)가 일부러 흘린 단서를 쫓아 행동에 나서게 된다. 과연 한이수가 그리고 있는 복수의 마지막 순간이란 어떤 모습일까?
물론 그럼에도 굳이 그런 복잡한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조해우를 자신의 복수극에 끌어들이려 한 한이수의 의도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해우가 아니어도 되었다. 조상국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도, 조상국의 죄를 세상에 알려 단죄받도록 하는 것도, 아니 설사 조해우의 역할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굳이 복잡하게 함정을 파고 그에 걸려들도록 유도하는 과정까지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이수라는 사실을 직접 조해우에게 알리기보다 조해우가 먼저 알고 찾아오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이수 자신의 무의식이었을까? 그럼에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조해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조해우가 마침내 한이수가 살아있음을 알아내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조상국 역시 한이현(남보라 분)에게서 들은 단서를 통해 한이수가 가지고 있는 카드에 대해 눈치채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한이수가 있다. 조해우에게서 한이수의 생존을 듣고 한이현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변방진(박원상 분)은 한이수를 잡기 위해 쫓기 시작한다. 조상국의 지시를 받은 헌책방 주인 역시 12년 전 그랬듯 한이수를 찾는 조해우의 뒤를 쫓는다. 심지어 오영준마저 한이수가 살아있음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조해우의 말에서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 오현식(장원중 분)이 한이수의 죽음과 관계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조해우를 사랑하기에 조해우의 평온한 일상을 흔들려 하는 한이수에 대해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조해우를 사랑하지만 과연 오영준은 어떤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모이기 시작한다. 멈췄던 시간이. 묻혔던 사건들이. 사람들이. 기억들이. 그 중심에는 한이수가 있다. 아니 한이수를 전면에 내세운 요시무라 준이 있다. 사람들은 혹은 그를 한이수라 기억하기도 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요시무라 준인 것이다. 모두의 눈이 한이수에게로 향하는 사이 요시무라 준으로써 그는 자신의 복수를 준비한다. 뱀처럼. 혹은 거미처럼.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마저 속여가며. 한이현을 위한 선물조차 복수를 위한 계획된 수단이 되어 버린다. 다만 그럼에도 그는 한이수일 것이다. 모순이며 딜레마다. 하지만 복수는 계속 진행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이수이지만 요시무라 준이다. 요시무라 준이면서도 그는 한이수일 것이다. 그 경계에 조해우가 있다. 한이수에게 그녀는 목적이었을 테지만 요시무라 준에게 그녀는 자신처럼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지금 한이수인가? 요시무라 준인가?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그는 한이수일 것인가? 요시무라 준일 것인가? 한이수로서의 무의식과 요시무라 준으로서의 의식이 충돌한다. 알 수 없는 복잡한 의도는 그로 인한 혼란일 것이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저조한 이유일 것이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너무 모호하다. 무겁고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한이수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아직 전혀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자신도 자신을 모른다.
한이수와 조해우 두 남녀주인공 사이에 어떤 시청자 자신의 판타지가 개입될만한 여지가 전혀라 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낮은 시청률에 한 몫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의 아내다. 과거의 인연이야 어찌되었든 이제는 전혀 남이 되어 있는 사이다. 훌륭한 남편이다. 자상하고 배려심 깊다. 항상 아내를 위해주고 아껴준다. 그런 남편을 배신하고 옛인연을 쫓아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다. 그런 좋은 남편과의 아직 신혼인 결혼생활에 끼어들어 남의 아내를 빼앗는다. 미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힘들 것이다.
비극을 예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토록 한이수와 조해우 사이의 운명과도 같은 인연을 강조해 왔는데 이제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든 그들은 다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 한이수의 복수가 성공하든. 아니면 조해우에 의해 저지당하고 실패하든.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서로에게 한이 되고, 원망이 되고, 후회와 미련을 남기게 된다. 그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과연 그런 행복할 수 없는 드라마를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 지켜볼 시청자가 몇이나 될까?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의 분위기가 우중충한 장마철 먹구름빛이다. 잿빛보다도 더 우울하다.
명쾌한 것이 없다. 기대해 볼 만한 꿈도 판타지도 없다.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통쾌할 것 같지도 않다. 문학작품이 아닌 드라마다. 영화가 아닌 통속성을 전제한 TV드라마다. 디테일도 썩 훌륭한 편이 되지 못한다. 대사는 평이하거나 때로 그 이하다. 긴장을 고조시킬만한 다른 장치 역시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한이수의 복수에 몰입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어려운 이유다. 기대할만하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구성과 전개는 충분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재미있기도 하다. 아니 재미있다. 오히려 그것이 아쉽다.
스릴러의 공식일 것이다. 전혀 아무런 악의 없이도 선의에 의한 말 한 마디로 주인공 및 주위를 위기에 빠뜨리고 만다. 그리고 주위에는 언제나 배신을 예고하는 의심스런 인물들이 있다. 여기서 약간의 장난을 침으로써 전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나오기도 한다. 한이현이 오빠 한이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조상국에게 털어놓고 만다. 검찰수사관 김수현(이수혁 분)은 여전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조상국 회장의 곁에는 한이수의 아버지 한영만(정인기 분)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박여사(정경순 분)가 있다. 어떤 변화와 반전이 이들로부터 비롯될까? 위기와 갈등과 긴장이 이들로 인해 고조되고, 사건이 바로 이들에 의해 전개되었다가 해결된다. 아직 요시무라 준은 혼자다. 기대하고 봐도 좋다.
지독하다. 철저하고 집요하다. 오로지 한 가지 복수를 위해서다. 복수 그 하나만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조해우가 울려 한다. 서로 엇갈리는 시간들이 가쁘게 흘러간다. 복수는 할 것이다. 사랑도 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장마가 진다.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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