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군의 태양 - 사랑보다 강한 필연, 주군 태양에 고백하다!

까칠부 2013. 9. 6. 07:10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주위의 물건들을 정해진 위치에 가지런히 정돈해 놓는다. 빛이라고는 없는 어둠 속에서도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물건들을 약속된 위치에 정확히 배치해 놓는다. 필요한 때 보이지 않더라도 바로 필요한 불건을 찾아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동시에, 그보다는 결국 제자리에서 벗어난 물건들로 인해 자칫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대비하는 것이다.

 

질서가 사라졌다. 자신의 세계를 지탱하던 원리와 법칙들이 무너졌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그녀가 납치범의 동료가 되어 납치된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아들이 납치되어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의 돈을 아끼기 위해 어쩌면 납치범들과의 협상을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건만. 아버지라면 자신을 납치범들로부터 구해줄 것이라 당연히 여기고 있었건만.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문자로 정돈된 기존의 세계가 그렇게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불확실한 혼돈만이 남았다.

 

그래서 주중원(소지섭 분)은 그토록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에 위치시키고자 그동안 그토록 노력해왔더 것이다. 쇼핑몰 '킹덤'의 사장실에 놓인 망원경이 그것을 상징해 보여준다. 항상 주중원은 망원경으로 쇼핑몰 주위를 살핀다. 항상 변함없이 정해진 규칙대로 정교하게 움직이는 세상을 보면서 주중원은 비로소 안도를 느낀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조금의 예외나 변수도 없이 예정된 법칙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다. 안심해도 좋다. 그가 항상 망원경 앞에 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주중원 자신이 만든 허상이고 구속일 뿐이다. 대기권 밖에서 보는 지구는 그저 둥그럴 뿐이다. 그보다 더 멀리서 본다면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산이 보이고 계곡이 보인다. 평화로워보이는 숲이지만 그 안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 대상으로서만 사람들을 대할 뿐 인격으로서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쌓아올린 허상의 성벽 안에서 그렇게 자기가 믿고 싶은 현실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려든다. 그것을 누구보다 주중원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가장 강박적으로 그것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것이 주중원 자신이다. 그런데 예외가 생겼다.

 

태공실(공효진 분)이 주중원에게 이끌리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태공실에게 주중원이란 삶과 죽음이 뒤섞인 혼돈 속에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세상의 질서와도 같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삶만이 존재한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현실만이 존재하게 된다. 비로소 자신이 현실에 속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현실에 속해 있다는 자각은 현실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주중원이란 방공호인 동시에 해방구다. 주중원의 곁에서 그녀는 자유로워지고 진실한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죽은 이들과 어울려도 그녀는 살아있는 현실의 '인간'이다.

 

마찬가지다. 태공실이란 완벽하게 짜여진 허상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주중원에게 다가온 비현실의 예외이고 변수였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다. 계량되지 않는다. 판단이 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통해 주중원은 비로소 자신이 현실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만든 허상의 세계가 아닌 실재하는 실제의 현실을 그녀로부터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 달라져간다. 정확히 자신이 그동안 쌓아올린 세계가 그녀로 인해 무너져간다. 하지만 짜릿했고 즐거웠다. 다시 원래의 지루하기만 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엔 미련이 남는다.

 

세상에 단 하나다. 한 사람이다. 주중원과 태공실에게 서로가 그렇다. 운명이다. 물론 강우(서인국 분)에게도 지금 사랑은 태공실 한 사람 뿐일 것이다. 그러나 강우는 굳이 태공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태공실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공실은 아니다. 주중원도 아니다. 주중원에게 태공실을 제외한 다른 상대란 자신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이루는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오로지 현실의 거래만을 이야기하고 이익만을 따지게 된다. 태공실과 함께 있을 때만 주중원은 온전히 주중원일 수 있다. 태공실 역시 마찬가지다. 주중원과 함께 하며 태공실은 고시텔을 나와 비로소 세상과 만나게 된다. 이보다 더 극적인 만남이 어디 있을까?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다. 숨으려 해도 숨을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중력과도 같다. 어디로 던져도 공은 땅으로 떨어진다. 중력에 이끌려 벗어날 수 없다. 아닌 척 외면하다가도 다시 무서운 것을 보게 되면 바로 주중원에게 달려가 매달리려 들 것이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결국은 태공실이 곁에 있을 때만이 자기라고 하는 실감을 가지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마음이 이끌린다. 주중원을 쫓는 태공실을 지켜보고 있는 강우의 모습이 애처롭다. 태공실만을 바라보는 강우의 모습을 뒤쫓는 태이령(김유리 분)의 표정 또한 안쓰럽다. 사랑이 운명이라는 것은 예상할수도 예정될수도 없는 우연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필연이 되고 구속하는 족쇄가 된다.

 

생명 없는 사물도 오랜 시간을 묵으면 영물이 된다. 사물에 쓰인 인간의 의지가 그렇게 만든다. 그저 물항아리다. 다만 그냥 물항아리라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한 장식화된 그림이 눈에 뜨인다. 물항아리로만 썼다면 굳이 그같은 복잡반 무늬를 그려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자는 장식용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물론 중요한 것은 고작 물항아리에 불과한 것이 사람들로부터 떠받들려지는 가운데 어느새 거짓된 자신을 가지고 다른 이를 유혹하려 든다는 내용일 것이다. 있지도 않은 차희주의 저주가 실체가 되고 마침내 희생자까지 내고 만다. 너무마 정교하게 만들어진 현실의 주중원은 조금의 틈조차 없이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차라리 현실이 된다.

 

항아리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의 문제다. 항아리에 투영된 욕망이 실체를 가지고 인간을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린다. 악의를 가져서가 아니다.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린 본성이 비틀려 드러나는 때문이다. 원래의 자신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다. 태공실이 솔직해진다. 불리해질 수 있음에도 친구들 앞에서 가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태공실을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태공실의 잘못이 아니다. 실체없는 실체가 생명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현실의 이야기다.

 

역시 로맨스로 돌아오니 본래의 실력이 나온다. 적절히 꼬아준다.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따위 없었다. 도망치려 했고 마침 핑계가 되어주었다. 태공실과 거리를 둔다.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서로에 대한 진심이 깊처진다. 강우의 진심과 태이령의 진실한 태도가 도리어 역설적으로 주중원과 태공실 두 사람의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게 된다. 놓아둘 수 없고, 놓아보낼 수 없다. 운명은 그렇게 두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간절함과 희망이 살아난다. 주중원이 태공실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물론 그 순간에도 차희주와 관계된 누군가가 주중원의 주위에 나타나고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주중원과 차희주의 진실은? 주중원의 태공실에 대한 진심을 확인한 시점에서 옛사랑이 다시 실체를 가지고 그에게 다가간다. 아파할 것이다.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할 것이다.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드라마가 풀어야 할 많은 숙제들이 해결되는 계기가 되어준다. 모든 의문들이 이로써 풀리게 된다. 어째서 차희주는 의문의 인물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있는 것일까? 사진속 그녀는 차희주인가? 아니면 차희주를 닮은 다른 사람인가?

 

역시나 귀신이야기로 들어가면 평이해진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 역시 투박하기만 하다. 태공실과 주중원을 분리한 것이 좋았다. 태공실이나 주중원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주중원의 고모 주성란(김미경 분)과 고모부 도석철(이종원 분)의 이야기가 맛깔나게 전개된다. 두 사람이 부부인 이유일 것이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현실이 현실인 이유다. 귀엽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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