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인간의 행동동기를 의무와 끌림 두 가지로 나누어 정의했다. 아마 이 가운데 끌림은 달리 충동으로도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의미도 조금 달라진다.
의무는 관계를 전제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충동이 곧 의무로 발전한다. 사회적 규범-즉 도덕과 윤리는 이러한 의무를 전제하여 성립한다. 반면 충동이란 관계를 전제하지 않은 오롯한 개인의 본능이며 욕구다. 오롯한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만 봉사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사회적 존재로써 과연 타인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혹은 거꾸로 사회적 규범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가.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이며, 남편이다. 역시 누군가의 딸이고, 누이이고, 엄마이며, 또한 아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유재학(지진희 분)이라는 이름의 개인이며, 나은진(한혜진 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이다. 남성이고 여성이다.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끌린다. 만남은 이내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은진도 지금의 남편 김성수(이상우 분)와 결혼했다. 차이라면 지금은 남편 김성수의 아내 나은진이라는 것. 그나마 유재학은 단지 의무만으로 부모의 명령에 의해 지금의 아내 송미경과 결혼하고 있었다. 한 남자와 여자로 만나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건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
간통이란 어쩌면 인간의 행동윤리에 있어 가장 첨예한 지점에 있는 행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 그런데 하필 유부남이고 유부녀다. 사랑이 죄인가? 이성에 대한 자연스런 이끌림이 그렇게 부도덕한 죄악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한 남자 한 여자만이 아니다. 서로에게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 자식들도 있다. 부모도 있다. 형제자매도 있다. 그밖에 친구며 지인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얽힌다. 오히려 개인이 강조되기에 더 이상 가정, 혹은 가문을 위해 인내할 것만을 강요할 수도 없다. 상처입고 고통받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죄악이 아니면 무엇이 죄악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런 이끌림을 마냥 부정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은진의 동생 나은영(한그루 분)과 송미경의 동생 송민수(박서준 분)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습은 그같은 역설을 말해준다. 사랑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계량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예정되지 않은 운명과도 같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
차라리 자신에게 떳떳하고자 배우자와 이혼하려 한다. 굳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배우자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아니 진정으로 배우자를 위한다면 끝까지 알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비록 거짓일지라도, 기만에 불과할지라도 겉모습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차라리 끝까지 자신에게 틀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송미경의 모습과 자신을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감시케 한 행위에 분노하는 유재학의 태도는 부부로서 서로에 대한 의무의 다른 지점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부부라고 하는 형식이다. 사랑을 전제하지 않은 의무로서의 부부관계다.
나은진과 사랑하는 동안에도 유재학은 아내 송미경에게 남편으로서 충실하려 했었다. 사랑해서 결혼했기에 유재학과의 사랑은 나은진에게 김성수와 헤어질 충분한 이유가 되어준다. 김성수가 분노한 것은 나은진의 불륜사실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자신에게 털어놓은 행동이었을까? 무엇이 배우자로서 더 큰 죄악이었을까?
어쨌거나 결론은 수렁이다.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나은진은 유재학과 헤어졌고, 남편 김성수와의 관계 또한 중간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다시 좋아지려는 조짐을 보인다. 분노하고 인내하고 증오하고 또 이해하려 노력하며 여전히 송미경은 남편 유재학과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그런데 꼬인다. 주위가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사람들의 말 한 마디가. 아무렇지 않은 행동 하나가. 심지어 일방적인 피해자인 송미경조차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동생 송민수를 끌어들이고 만다. 이번에는 송민수와 나은진의 동생 나은영이 사랑에 빠졌다. 어찌해야 하는가.
정석적이다. 어떤 동정도 내보이지 않는다. 연민은 보이지만 연민이 현실을 바꿔주지는 않는다. 네 행동의 결과를 보라. 마치 송미경 자신이 된 듯 냉정하게 한혜진의 절망을 지켜보게 한다. 감정마저 마모된 듯한 송미경을 연기하는 무감동의 김지수의 연기는 극치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논쟁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8회다.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 불륜은 죄악이다. 배우자를 배신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것으로 끝일까. 이제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도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 하는 유재학은. 여전히 마음은 나은진을 향해 있지만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한 의무를 잊지 않고 있다. 그런 유재학을 더 용서할 수 없는 송미경은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을 속일 수 없어 나은진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끝내 열기를 주저하던 판도라의 상자를 나은진이 스스로 활짝 열어젖혔을 때 김성수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그들의 딸과, 그들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그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모두. 그리고 그들이 선택할 답들에 대해서. 송미경과 송민수 두 사람은 부모의 부정이 낳은 가장 큰 희생자일 것이다. 무엇이 가장 옳은 선택일까.
인간이 수단이었다. 배우자란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송미경을 선택했다. 가장 쓰기 좋은 유용한 도구였을 테니까.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남편으로서 유재학이 송미경에게 가지고 있던 의무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현실에 길들여진다.누군가의 아내일 수밖에 없고, 엄마일 수밖에 없다.
송미경이 송민수에 집착하는 이유다. 송민수가 있다면 그녀는 누군가의 누나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은진은 어느 순간에도 나은진일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 나은진이고자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마침내 거침없이 남편 유재학을 미워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유재학은 송미경을 의무감으로 대하고 있다. 송미경에게 상처가 된다. 김상우가 남편이 되려 했을 때 나은진은 스스로 나은진임을 선언한다. 역설일 것이다. 인간은 어째서 자유롭지도 행복해지지도 못하는가.
의도한 것인듯 다양한 장치들이 보인다. 하필 간통죄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올케 윤선아(윤주희 분) 역시 그 하나일 것이다. 주위를 통해 전해지는 다양한 간통의 사례들 또한 마찬가지다. 나은영과 송민수가 사랑에 빠진다. 송미경의 시어머니 추여사(박정수 분)의 말 한 마디에도 의미가 부여된다.
하지만 역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특히 김지수의 연기는 드라마 자체를 홀로 이끌어가고 있다. 항상 한혜진의 연기가 아쉽다. 간통이란 무엇인가. 아니 인간의 죄란 무엇인가. 드라마로서의 재미 또한 훌륭하다.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된다. 인간은 혼자서만 살 수 없다. 혼자서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다. 족쇄가 인간을 존재케 한다. 그다지 취향은 아닌데 재미있다. 가장 큰 미덕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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