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말씀으로써 모든 것을 만들었다. 로고스란 언어이며 구조다. 인간은 언어로써 사유하고 인식하고 기억한다.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한다. 언어에 의해 인간은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을 채우는 것은 곧 언어인 것이다. 그런데도 언어란 - 즉 말이란 얼마나 쉽고 가벼운가. 얼마나 하찮게 쓰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흉폭한 무기가 되고 마는가.
작은 의혹이 어느새 사실로 확정된다. 하나씩 말을 더해가는 가운데 어느새 말은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게 된다.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 무책임한 말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인간의 영혼을 헤집는다. 천송이(전지현 분)와 한유라(유인영 분)의 말다툼이란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 살벌하지만 사실 서로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아무렇지 않게 걱정해주고 아무렇지 않게 덕담을 한다. 결혼하고 나면 은퇴할 테니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싸가지없다는 말이 차라리 정감있게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말 몇 마디가 어느새 실체를 가지고 천송이를 궁지로 모는 흉기가 되고 있다.
어느 한 개인이 말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 형상도 없고 실체도 없다. 그러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말이 아닌 말을 하고 듣는 당사자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그러나 다수가 같은 말을 공유한다면 그때부터는 말에도 형상이 만들어지고 실체가 생겨난다. 규모가 커질수록 말하고 듣는 당사자는 사라지고 말만이 남게 된다. 말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성장하고 번식해간다. 신조차 인간의 말에 깃든다. 처음 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누구이든 신은 인간 사이에서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게 된다. 하물며 살인 정도야. 과연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떠도는 그것과 현실의 그것이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일까.
오히려 인간이 인간 사이에서 더 고독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천송이를 좋아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듯, 천송이를 싫어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다. 처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유는 사라져 버리고 관성만이 남게 되었다. 천송이라는 인간은 있는데 천송이라고 하는 대상은 사라진다. 과연 천송이를 앞에 두고도 천송이 때문에 한유라가 죽었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은 가능하다. 말이 개인의 의지를 넘어섰으니까. 말의 힘을 빌어 - 혹은 말의 힘에 떠밀려 천송이에게 강요하고 억압하려 한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사실이어야 한다. 많은 소문들이 그렇다. 인간은 그런 가운데 사라져 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인간에게 의지하고자 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민준(김수현 분)은 먼 다른 별에서 왔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았다. 천송이는 5천만이라는 대한민국의 대중 앞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다. 먼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도민준을 인간으로부터 유리시킨다면, 천송이는 인간과의 관계로 인해 인간으로부터 유리된다. 누구도 그녀의 진실을 알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천송이와 친구로써 소통하던 홍사장(홍진경 분)과 유세미(유인나 분)는 천송이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유세미조차 어느새 주위의 관계와 말에 휘둘리며 흔들리고 만다. 어째서 도민준은 외계인이고 천송이는 여배우인 것일까.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만다.
고작 명예다. 가문의 이름이다. 단지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문의 이름인 것이다. 가문의 일원으로써 존재한다.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상과 만나고 소통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손자이고 먼 조상의 후손이다. 장차 자신의 아들이, 손자가, 먼 후손이 그 이름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자신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다. 딸의 목숨마저 그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혹은 어떤 이념이나 신념을 위해서. 신을 위해서.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사람은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을 소외시킨다. 동료들과 떨어져 먼 지구에 혼자 남은 어느 외계인처럼.
하기는 인간이 운명을 꿈꾸는 이유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기를 바란다. 자신의 곁을 지켜줄 예정된 누군가를 기대한다.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란 사무치기 때문이다. 천송이가 운명을 믿는 이유다. 도민준이 운명조차 믿지 않게 된 이유이다. 기대가 더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희망이 인간을 더 절망하게 만든다. 그는 스스로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의 따뜻했던 기억이다. 아주 먼 오랜 기억의 자락이다.
실체없는 말이 사람을 궁지로 몰아간다. 실체없는 명예가 자식마저 죽이도록 만든다. 아무렇지 않은 말들에 상처입고 화내는 실체들이 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도민준을 둘러싸고 가쁘게 사건들이 돌아간다. 도민준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도 나타나는 듯하다. 유세미는 욕망에 눈을 뜨려는 모양이다. 도민준과 천송이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문다. 재미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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