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정도전(조재현 분)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우왕 3년인 1377년이었다. 드라마에서 한창 진행중인 황산대첩보다 3년이 빠르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인 영주에서 4년을 지내다가 이후 삼각산과 부평 등을 전전하며 후학을 기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성계(유동근 분)와 만나는 것은 그로부터도 다시 2년 뒤인 우왕 9년 1383년이었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와 싸우고 있을 무렵이면 정도전은 아직 영주에 있어야 한다.
이인임(박영규 분)과 이성계는 또한 한 편으로 함께 왜구와 맞서싸우던 전우이기도 했었다. 우왕 3년 그러니까 정도전이 유배에서 풀려나던 해 왜구가 강화도까지 침범하자 조정은 이성계와 변안열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경기도통사가 된 이인임의 지휘를 받도록 했었다. 이때 6도도통사로 군을 지휘한 것이 최영(서인석 분)이었다. 최영의 홍산대첩이 있은 그 이듬해였다. 그 밖에도 황산대첩이 있기 전에도 전국을 누비며 왜구와 맞서싸웠는데 하필 우왕 6년에 때를 맞춰 함경도에 머물다가 개경에 올라온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더구나 아직 유배중이던 정도전마저 고려군의 진중에 있었다.
고려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도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이 끊긴 지 오래인데다 개경과 지척인 강화도에까지 왜구가 출몰하고 있었다. 개경에서는 식량이 떨어지고 관리들은 녹봉마저 지급받지 못했다. 이인임의 주도로 천도가 논의되기까지 하고 있었다. 중앙군은 와해되고 원수들에 의해 사병화된 지방군은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못했다. 곳곳에서 왜구들에 패하며 온 고려가 몸살을 앓는 시점에 가장 정예의 군대를 보유한 이성계를 함경도에 묶어둔다? 이인임을 악역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였을 것이다. 고려조정으로부터 견제당하며 손발이 묶인 이성계와 날개가 꺾이고 좌절한 젊은 천재의 만남은 그만큼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든다.
자잘한 부분들은 잘라낸다. 역시 우왕 3년 지윤이 이인임과 사이가 벌어진 끝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 지윤이 이성계와 사돈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에게는 개경에 경처인 강씨(이일화 분)를 제외하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이인임의 동생과 사돈을 맺은 적도, 최영의 친척과 사돈이 된 적도 없다. 고려조정에서 이성계는 철저히 이방인이자 주변인이었으며, 따라서 역시 관직조차 얻지 못하고 유배지를 떠돌던 시대의 반항아 정도전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만든다. 정몽주(임호 분)가 어느새 주류에 머물고 있다면 그때까지도 이성계나 정도전이나 철저히 비주류에 머물고 있었다. 사실관계만 놓고 본다면 명백한 왜곡이고 거짓일 것이다.
사실 원수란 원래는 유사시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기 위한 임시기구였다. 그러다 공민왕 이후 많은 전란을 겪으며 점차 상설화되기 시작했다. 개인이 원수직을 계속 맡으며 해당 지역이 원수 개인에 예속되어갔다. 더구나 여러 원수가 동시에 한 지역에 임명됨에 따라 지휘체계의 혼선마저 불러왔다. 여러 원수들을 배치하여 전투에 동원하는 것 역시 각 원수가 보유한 전력을 전장에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앙의 정규군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성계의 사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군이 원수 개인의 사병이었다. 역시 당시 고려가 놓인 현실을 보여주는 예로써 소홀히 넘어간 것이 아쉽다.
굳이 이런 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과도하게 편집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정도전이 유배에서 풀려나던 무렵 지윤이 숙청되었다. 지윤과 이성계는 사돈이었다. 바로 전해 최영은 홍산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야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철원부원군에 제수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듬해 이인임과 최영이 천도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화도까지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이성계를 휘하에 두고 이인임은 최영과 함께 전장에 나서고 있었다. 정몽주가 사신이 되어 일본으로 떠나고 있었다. 정도전이 고향에 머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적당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었을까?
드라마란 픽션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편집이 가해질 수도 있다. 지금껏 허용해왔었다. 하지만 의도가 사실을 넘어서서야 '역사드라마'라는 타이틀이 민망해진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 드라마 '이인임'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인임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 이인임을 악역으로 만들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 이인임이 악역이 되고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에 맞선다. 박영규의 연기와 존재감이 그만큼 탁월하기도 하다.
염흥방의 변절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아쉽다. 올곧은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꺾고 타락해간다. 이인임에 의해 우왕의 스승으로 이명된 이색의 입장 또한 너무 소홀히 지나쳐간다. 경복흥이 탄핵당하는 과정은 이인임과 지윤 등의 전횡과 관계가 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편이니 그의 야망과 그를 위한 정치적 행위들이 모조리 거세된다. 궁금하기도 하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만나려면 멀었는데 어떻게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릴까? 인연이 중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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