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좌절과 무력감, 그들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다

까칠부 2014. 2. 2. 07:38

정치란 힘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더 큰 힘을 가져야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고려에서 가장 강한 무(武)를 지니고 있음에도 최영(서인석 분)이 이인임(박영규 분)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전장에서는 감히 최영을 당해낼 수 없을 테지만 조정이라는 또다른 전장에서 이인임은 최영이 넘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대부가 이인임을 탄핵하는데 실패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인임을 겨눈 사대부의 칼날은 이인임을 비호하는 세력까지 꿰뚫기에는 너무 물렀다. 무른 쇠를 날카롭게 벼려봐야 작은 충격에도 휘고 이가 빠질 뿐이다. 조정의 대신들이 이인임의 편을 들고 있었다. 군을 장악한 무신들이 이인임의 편에 서고 있었다. 고려의 대부분의 힘은 권문세족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는 의기만 높을 뿐 아무런 힘도 없었다. 힘없는 다수가 모여봐야 힘없는 다수일 뿐이다. 나뭇가지를 하나로 모아도 더 크고 날카로운 도끼로 내리찍으면 그대로 부서질 뿐이다. 사대부들이 이성계(유동근 분)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이유였다.


끝내 좌절하고 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다. 생각하는 바는 옳다. 행동하는 것도 도리에서 어긋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힘이 없다. 당장 자신과 양부인 황연(이대로 분)을 구하기 위해 박수에게 자기를 판 양지(강예솔 분)의 빚을 갚을 돈조차 구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여유가 되는 친구들에게 빌려보려던 것도 대부분이 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처지가 되었으니 양지가 박수에게로 가는 것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아무리 뜻한 바가 옳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성계에게는 힘이 있었다. 여진기병이 포함된 동북면의 사병들은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정예였고, 이성계 또한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상승의 명장이었다. 명분이 문제일 뿐 실력만 가지고 보았을 때 임견미(정호근 분)가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왕이 될 것이라 한다. 장차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어떤 왕이 될 것인가? 아직 고려는 왕씨의 나라다.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야 한다. 수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그만한 당위를 가지는가? 정치하는 자신이 두렵다.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두렵다.


힘없는 정의와 정의없는 힘이 만난다. 힘이 없어 꺾이고 만 의지와 의지없이 표류하는 힘이 서로 만나고 만다. 이인임과 최영의 관계와도 닮았다. 다만 이인임의 의지에는 정의가 없고, 최영의 힘에는 인정이 없다. 땅끝마을도 고려의 영토고 땅끝마을에 사는 사람도 고려의 백성이다. 고려를 침범한 왜구를 토벌해야 하는데 병사로 징발될 백성들의 가엾은 사정을 안타까워 이성계는 눈물마저 글썽인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모른다. 이성계가 정몽주(임호 분)에게 이끌리는 이유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슷한 무렵 정도전(조재현 분)은 자신 앞에 놓인 사명을 깨닫는다.


정도전의 정의에도 인정은 없었다. 정도전의 올곧은 의지에는 현실이 결여되어 있었다. 무엇때문에 자신이 정의로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자신이 한결같은 의지를 가지려는 것인지. 스스로 감히 사람이기는 하느냐고 묻는다. 희망을 가지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막연한 기대 뒤에 찾아올 더 큰 절망에 익숙하다. 만족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체념했기에 놓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현실에 순응하며 죽을 수 없기에 어떻게든 살아간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그리고 자신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정도전의 의지가 구체화된다. 정도전의 정의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각성이다. 비로소 간절함을 얻는다. 지금 정도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준비를 마친다. 이성계가 그를 필요로 하기 전에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를 절실하게 바라게 된다.


자신의 권력 말고는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왕실의 안위 - 혹은 자신의 신념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인임은 백성을 버리고, 최영은 사대부를 버린다. 다른 모든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이 도태되고 마는 이유다. 고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무엇이 위기인가? 무엇이 원인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 대안이고 해법인가?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성에 갇힌 그들의 좁은 시야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만다. 지금 자신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그들이 아닌 이성계와 사대부들이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쉽다면 이인임의 이성계를 향한 도발과 견제가 지나치게 직접적이다. 진정 간신이라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다. 왕을 끼고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앞세운다.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진 이성계와 직접 적대하느니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오히려 이성계와 더 가깝게 지낸다. 이인임이 집권하던 시기 이성계는 정치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조금 더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고 농락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너무 쉽고 간단한 악인의 모습이 아닌가.


왜구의 차림새 역시 많이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사료에 기록된 왜구의 모습은 드라마에서와 같은 통일된 복식에 잘 훈련된 정규군의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갑주조차 없이 알몸으로 날뛰던 사나운 야만인이었고, 일관된 지휘체계 또한 갖주치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패잔병들인데 너무 질서정연하다. 하기는 당시 왜구들이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묘사하려면 드라마가 아니라 스너프필름이 될 것이다. 그 참혹한 학살과 약탈의 기록을 화살 몇 대로 대신한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많은 사람이 죽어 쓰러지고 있다.


틀이 갖춰진다. 위치와 역할이 나뉜다. 악당이 된다. 여전히 박영규의 관록과 역량은 대단하지만 이인임은 전형적인 악당이 되어가는 듯한 모양새다.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될 창업군주로서 이성계의 무게와 깊이를 유동근은 기대한 그대로 훌륭히 묘사해 보여주고 있다. 성급하기만 한 선비에서 정치가로 정도전도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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