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고려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이인임에게 묻다

까칠부 2014. 2. 10. 07:18

근대 이전 백성들이 - 특히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들이 가장 살기 좋았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의 조세단위인 1결이 최대 400말의 곡식을 생산했는데, 이 1결에서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던 세금이 여러 명목을 더해 20말 2되에 불과했다. 퍼센테이지로 따지면 대략 5% 남짓만을 세금으로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조선이 추구하던 중농주의 역시 백성을 먹이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리 금광에서 금이 쏟아지고 시장에는 돈이 넘쳐나도 결국 땅에서 난 쌀이 있어야 백성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쌀을 금과 바꿀 수는 있어도 금을 쌀대신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고려말 사대부들은 아프도록 경험하고 있었다. 유학이 농업을 중요시여기는 경향을 보이는 것 역시 그 시작이 중국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였던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백성이 먼저 배부르게 먹고 편안히 쉴 수 있어야 나라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물론 권력의 타락과 정치의 부패는 역사의 필연적 과정 가운데 하나다.


고려의 지배층은 귀족이었다. 귀족은 태생부터 그 신분이 다른 사람들을 뜻한다. 조선의 지배층은 사대부였다. 사대부 또한 양인이었다. 양인이란 농어민의 백성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뭇백성 가운데 배우고 깨달은 자가 있어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이끈다. 거기에는 도덕적인 의무와 당위가 포함된다. 천하는 공물이라 말하는 대동의 사상이었다. 심지어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던 노비의 삶에 대해서까지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에서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최소한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지배의 방식을 보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후기에 들어서도 향촌의 지배자는 여전히 향촌에 뿌리를 둔 양반들이었다.


조선이 세워진 이유였다. 고려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고려는 혈통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조선 역시 상당부분 혈통에 의해 지배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혈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거라고 하는 시험을 통해 검증된 자신의 실력이었고, 그 실력을 통해 맺어진 학연이야 말로 조선사회를 관통하는 중심이었다. 스스로 배우고 익히고 갈고닦아 충분한 자격을 갖춘다. 그리고 그런 만큼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을 지운다. 정승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청백리였고, 권력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선비로서의 의기와 지조였다. 백성을 천하의 근본으로 여긴 맹자의 사상이 여기에 더해졌다. 비록 고려로부터 이어진 여러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기는 했지만 조선의 건국은 그야말로 혁명이라 해도 좋을 사건이었다.


정도전(조재현 분)이 묻고 있다. 고려가 과연 할 수 있겠는가? 고려로써 과연 그것들이 가능하겠는가? 이인임(박영규 분)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인임의 고려는 그것이 불가하다 말하고 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해서는 안된다는 불가다. 그것은 고려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정도전의 선택은 결정되었다. 고려로는 안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정도전이 품에서 놓지 않고 있던 맹자의 귀절이 단서를 던져준다.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면 왕도 바꿀 수 있다. 백성을 위태롭게 한다면 왕조 또한 바꿀 수 있다.


다만 힘이 부족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종 2품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사실상 이인임 정도의 힘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최영의 무력으로도 그것은 역부족이다. 세상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 힘이다. 이인임이 고려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인임에게 그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고려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했을 것이다. 현상유지야 말로 이인임의 한계다. 그의 권력은 고려의 현재로부터 나온다. 지금의 고려가 사라진다면 이인임의 권력 역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이인임은 고려를 지키려 하고, 이성계(유동근 분)은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인임을 죽이고 최영(서인석 분)마저 꺾었을 때 이성계에게는 그러한 힘이 주어지고 있었다.


짧지만 중요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조선이었는가? 어째서 고려인 채로는 안되었는가? 이인임을 통해 고려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도전에게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한 신분이었던 이의 원대한 이상과 밑바닥을 경험한 이의 현실이 부딪히고 만다. 이는 장차 정도전이 이색과 정몽주와 끊임없이 대립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앞으로도 차례로 이들을 통해 고려의 모순과 한계는 정도전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고려는 끝났다. 정도전에게 고려는 이미 수명이 다한 죽은 왕조였다.


이성계의 매력이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소탈하고 겸손했다.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들을 존경하고 예우했다. 정도전, 정몽주 등과 나이차이가 적지 않았음에도 항상 스승으로 여겼고 벗으로써 대했다. 이성계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더 이유였다. 하물며 정도전과 정몽주는 이성계에 비해 관직마저 낮았다. 물론 이색은 학자로서의 명성이나 조정에서의 영향력이나 이성계와 감히 비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기꺼이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정중히 자신을 낮추어 대화를 나눈다. 불패상승의 무장으로서보다 오히려 더 한 나라를 세우는 건국왕으로서의 크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아직은 의기 뿐이다. 정의감만 앞선다. 그러나 그 정의감은 이인임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인임의 경륜과 노련함을 앞서지 못한다. 압도당하고 만다. 설득당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논리가 없다고 해서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논리가 없다면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최영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이인임을 해낼 수 있다. 더 나은 대안이 없다면 이인임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힘을 찾는 정도전과 세상을 바꿀 논리를 찾는 이성계, 퍼즐조각처럼 운명과 필연이 만들어진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논리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더 멀리 봐야 한다. 더 크게 봐야 한다. 복잡한 논리가 있다. 알지 못하는 치밀한 이론이 있다. 정의감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당장의 온정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스스로 구제하려는 노력만을 저해할 뿐이다. 나라를 위해. 혹은 민족을 위해서. 더 지독한 것은 국민을 위해서. 어차피 오늘 치울 시체를 내일 치우게 될 뿐이다. 인정이 배제된 논리란 이렇게 저열하다. 그러나 그것을 정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비춘다. 지금 저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논리 없는 정의와 정의 없는 논리. 힘이 없는 정의와 정의 없는 힘. 의지 없는 정의와 정의 없는 의지도 있겠다. 하기는 그쯤 되니 그래도 한 자리씩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무엇이 현실을 결정하는가?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인임과 대립하며 이성계와의 인연도 엇나간다. 정도전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간절한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담을 그릇을 스스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는 자신과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다.


아무래도 정도전으로서는 역부족이다. 공민왕에 이어 이인임, 최영, 이제는 이성계까지. 다음은 아마 정몽주의 차례일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이름들이다. 명분과 권력과 무력과 정의와 치밀한 이성. 그리고 비로소 정도전에게도 자신의 차례가 돌아온다. 그것은 아마도 실천. 비워가고 있다. 끊임없이. 채울 그날을 위해. 그래서 절망하고 좌절한다. 아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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