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임수향 분)가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을 아는 모양이다. 하기는 모를 수 없다. 돌아오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야의 입을 빌어 말한다. 가야가 죽인 것이 아니다. 가야가 아니더라도 죽었을 것이다. 오히려 끝나지 않을 고통을 줄여준 불과하다. 차라리 아버지의 죽음을 따져묻는 신정태(김현중 분)가 죄인이 된 듯하다. 가야가 피해자가 된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일국회와 신정태 사이의 오랜 악연이 크게 흐려진 듯하다는 점일 것이다. 일국회의 회주 도야마 덴카이(김갑수 분)의 출연분량이 상당히 줄었다. 도야마 아키오(윤현민 분)와 신이치(조동혁 분)의 대화 역시 의미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강경한 이미지의 야마모토(정진 분) 또한 단역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오로지 가야와 신정태만이 남는다. 정재화(김성오 분)와 담판지을 때도 가야 혼자 나서고 있었다. 가야가 곧 일국회가 된다.
반면 초반 우호적인 관계로 그려지던 황방과 설두성(최일화 분)은 끝을 알 수 없는 음험한 속내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너무 친절하다.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누가 신영출(최재성 분)을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그러면 어째서 신영출의 아들 신정태를 굳이 왕백산(정호빈 분)까지 보내 상하이로 불러들였는지. 만일 신정태마저 자신들의 행사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죽일 것이다. 원래 신정태와 적대관계이던 일국회의 역할을 황방이 대신하려는 모양새다. 방삼통의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것도 일본인의 일국회가 아닌 중국인의 황방이다. 일국회의 가야의 눈물은 안타깝고, 황방의 설두성의 웃음은 혐오스럽다.
어떤 의도를 의심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처음 드라마는 식민지의 현실과 조선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세밀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좌절과 절망을, 그리고 조선인들의 체념과 절박함을, 어째서 신정태가 밀수조직인 도비패에 몸을 담게 되고, 싸움으로 나날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일국회의 의도가 드러날수록 일국회의 배후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역시 보다 선명하게 보여지게 된다. 그런데 상하이로 무대가 바뀌고 작가 또한 바뀌면서 일국회로 대표되는 일본제국주의는 더이상 방삼통의 조선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인의 황방과 상하이를 조차하고 있는 열강의 경찰들이 조선인을 뒤쫓고 그들을 겁박한다. 일국회 - 아니 가야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또한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는 신영출의 마지막 숨을 끊은 것은 가야 자신이었다. 어차피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신영출을 살리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가야는 의사가 아니었고, 신영출의 상태에 대해서도 의학적으로 엄격하게 살펴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의적인 판단과 믿음만으로 행동을 결정했다. 신영출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던 가야 자신의 입장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오히려 당당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자기는 단지 고통을 줄여주었을 뿐이다. 다른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이른 상태에서 단지 끝나지 않을 고통을 줄여주려 마지막 손을 썼을 뿐이었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 자기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믿지 않고 오해부터 하는 신정태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자기는 신정태를 믿었는데 어째서 신정태는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인가.
가야의 아버지 데구치 신조가 죽었을 당시에는 신영출이 데구치 신조를 죽이려 했던 이유가 배경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데구치 신조를 죽여야만 했던 당위가 데구치 신조의 마지막 숨을 끊은 신영출의 행위를 갈음한다.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알고 아버지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그를 통해 신정태와도 용서와 화합으로써 다시 맺어질 수 있다. 가야의 부모 역시 일국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를 죽인 신영출의 행위는 그렇게 가야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가야가 신영출의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 정황은 당시 신영출이 놓였던 상황과는 상당히 다르다. 아버지 신조의 마지막 숨을 끊었지만 신영출에게는 그만한 이유와 당위가 있었다. 가야의 행동을 신영출의 그것과 같이 놓기 위해서는 아버지 신조의 행위를 지우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 신조를 죽인 신영출의 행위와 신영출을 죽인 자신의 행위만이 남는다. 그리고 똑같이 신조와 신영출을 죽인 진범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이 남게 된다. 가야가 그것을 묻는다. 자신이 아닌 진짜 신영출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따로 있다. 그것을 신정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가야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화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야는 당당하기만 하다.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신정태와는 달리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신정태에게 원망을 돌릴 수 있는 것은 그래서였다. 자신의 칼이 신영출의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칼이 낸 상처가 신영출의 직접적인 사인이 된 것도 맞지만, 그러나 신영출을 실제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따로 있었다. 신정태가 원망해야 하는 것도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도 그 범인이다. 신정태에게 진짜 범인을 가르쳐주고 원수를 갚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대신하려 한다. 신정태를 성장케 하고 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그를 위한 배려다. 죽은 신영출을 위한 속죄다. 할 만큼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킨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한다. 가해자에서 억울하고 가련한 피해자가 된다. 마치 현실의 누군가를 보는 것 같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감춰두었던 죄책감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옥련(진세연 분)과의 진전된 관계는 그 단서가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 신정태가 돌아갈 곳이다. 돌아가 머물 곳이다. 가야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가쁘게 돌아왔지만 이미 그곳에는 김옥련이 있다. 소소(김가은 분)도 신정태의 주위를 맴돈다. 희생은 기만이다. 그녀는 일국회 상하이 지회주다.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거나 부정한 적 없다. 지금도 일국회 지회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목적이야 어떻든 지금 그녀가 머물고 있는 그곳이 그녀를 정의한다. 그녀의 행위는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물음조차 던져 본 적이 없다.
사이나쁜 형제 같다.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싸우는 배다른 형제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정통성은 동생에게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지 못했으니 다른 것이라도 물려받아야겠다. 아버지의 곁을 지킨 것은 정통성을 갖춘 동생이 아닌 피도 다른 자신이다.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신정태의 존재를 미워했다면 정재화(김성오 분)는 벌써 손을 쓰려 했을 것이다. 질투다. 모두가 아버지의 아들을 말한다. 형님의 동생은 말하지 않는다. 신영출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자신만이 권리가 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서자란 - 혹은 양자란 그래서 서럽다. 그래서 자꾸 엇나가려 한다. 귀엽기조차 하다.
가야가 억지스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신정태의 주위로. 너무 친절했다. 변명처럼 말도 너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자신을 먼저 납득시킨다. 어쩐지 신정태도 그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 거기서 틀어진다. 자연스럽게 풀어갈 것을 무리하게 설득하고 이해시키느라 불필요한 오해마저 만들고 만다. 사족이 붙었다. 신영출의 부검자료를 보고 눈물짓던 모습이면 사실 충분했다. 하지만 역시 가야는 너무 멀리 가 있었다. 돌아오려면 길이 너무 멀었다.
늑대가 아닌 시라소니다. 왕백산의 저 대사 역시 너무 친절하다. 이미 신정태의 모델이 누구인가 대부분 짐작하고 있다. 신의주가 고향이고 도비노리를 했으며 중국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강자들과 싸웠다. 사납고 민첩하며 영리하다. 다만 과연 신정태의 싸우는 모습이 그에 부합하는가는 별개일 것이다. '감격시대'라는 제목을 떠올린다. 이성순이 아닌 신정태다. 인상적이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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