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프고 힘든 것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한없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다. 언젠가는 멈추고 싶다. 미워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모두 그만두고 편해지고 싶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된다.
선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도 낯설기만 하다. 그런 감정들이 거북하고 부대낀다. 박강재(조진웅 분)도 그것을 안다. 그도 한때는 사람을 믿었고 사람의 선의를 믿었을 것이다. 박강재의 절망과 좌절은 그 밝았던 희망의 잔재일 것이다. 익숙해진다. 아무렇지 않게 된다. 포기한다. 자기 자신마저.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영원(한지혜 분)은 그동안 정세로(윤계상 분)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다. 기억하려고도 않았다. 그저 한 가지만을 새기고 있었을 뿐이다. 정세로가 공우진을 죽였다. 정세로는 살인자다.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절대 용서받아서도 안된다. 그런 한영원이 어느새 정세로를 만나고 싶어한다. 만나서 묻고 싶어한다.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알고 싶다.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정세로의 할머니(김영옥 분)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한영원의 모습에서 정세로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영원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할머니는 집으로 도망가 숨고 두려움과 원망으로 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한영원을 쫓아와 수건으로 닦아준다. 정세로 - 아니 이은수를 이해하려 한다. 그를 위로하려 한다.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아주려 한다. 그만 보고 말았다. 할머니의 손에 수건값이라고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는 모습을. 약혼자라고 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정세로의 할머니였다. 화가 난다.
정세로가 한영원에게 화난 것은 자신의 상처를 들쑤셔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도 아니었다. 그만 공감하고 만 것이었다. 한영원의 입장을 이해하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자신처럼 한영원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 갑작스럽게 잃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기꾼이었던 것처럼 한영원이 사랑했던 사람 역시 사람들로부터 다이아몬드를 빼돌렸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였기에 사랑했다. 모두가 공우진을 의심하는 순간에도 한영원만은 그를 흔들림없이 믿고 있었다. 용서해서는 안되는데. 이해새서도 안되는데. 미워하고 원망해야 하는데.
용서하고 싶느냐는 박강재의 말에도 정세로는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던 자신의 진심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려 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같은 모순된 현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는 사기꾼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공무원이 되기 위해 행정고시를 준비했고 합격까지 했던 성실하고 바른 청년이었다. 그가 범죄조직과 한패가 되어 사기에 동참하려 하고 있다. 사기꾼이 아닌 자신과 사기꾼과 한패가 된 현실이 충돌한다. 항상 세상일이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마 많은 범죄의 피해자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아예 보지 않고 그저 미워하고 원망만 하면 좋을 것이다. 오로지 원망과 증오를 쏟아부을 대상만 있으면 상관없을 것이다. 끝없이 미워하고 미워하고 또 미워한다.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그를 통해 현실의 슬픔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다. 너무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대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돌린다. 그런데 혹시라도 범죄의 가해자를 만나거나 그 가족과의 접촉을 통해 범죄자에 대해 이해하게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말했듯 원망과 증오란 자신을 소모하는 감정이다. 지친다. 본능은 이제 그만 편해질 것을 요구한다.
만나고 싶다. 누가 그랬는지. 어떤 사람이 그랬는지. 그리고 알고 싶다. 어째서 그랬는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납득하고 싶다. 그래도 그럴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겠거니. 어쩔 수 없는 어떤 사연이 감춰져 있지 않았을까. 아프고 서러운데 억울하기까지 하면 너무하지 않은가. 헛된 바람이지만 자신과 피해자인 당사자를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서하기에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선량한 진심과 흉악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모순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복수인가? 그 이전에 과연 복수를 하고 싶기는 한 것인가? 쉽게 용서를 말하는 것처럼 쉽게 복수를 말한다. 쉽게 용서하는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쉽게 복수하는 자신 역시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용서를 쉽게 말하는 사람처럼 복수를 쉽게 말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그같은 처지에 놓여보지 못한 이들일 것이다. 박강재처럼 닳고 닳은 이라면. 그렇게 쉽게 자신과 타협하고 쉽게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한태오(김영철 분)처럼 욕망과 이기로 똘똘뭉친 괴물이라면. 그러나 평범하고 선량한 개인일 뿐이었다. 그들의 복수란 - 정세로와 한영원의 복수란 그렇게 너무나 어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일관되지 않은 감정이 시청자를 혼란케 한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과정들이 시청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치밀하고 냉정하게 오로지 복수만을 바라보는 통쾌함과 날선 긴장이 보이지 않는다. 질척거리는 감정의 찌꺼기만이 너저분하게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인물들 자신들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텐데 시청자더러 이해하고 공감하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다. 지나치게 머리를 썼다. 드라마는 영화가 아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보다 잘 계산된 연출이 더 눈에 들어온다. 정교한 비유와 상징들이 드라마의 빈약함을 돕는다. 이야기의 개연성보다 작가가 의도한 주제가 더 중요하게 드러난다. 필요한 때 필요한 감정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배우의 연기야 말로 이 드라마의 전부일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어둠에 어물며 빛을 동경한다. 때로 빛을 질투한다. 순결한 빛에 싸인 한영원은 그러나 순진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들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서로를 원망하며 서로에게 원망받는다. 그것은 원죄와도 같다.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한영원은 자신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강재의 사기극이 본궤도에 오르면 조금은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정세로를 찾아내려는 한태오의 노력이 한영원의 주위를 맴도는 정세로와 만난다면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정세로의 복수가 시작되고 모든 당사자들이 자신의 죗값을 받는다. 한영원을 동정하면서도 그녀가 지은 원죄의 댓가를 치르기를 바란다. 아직은 잔잔하다. 그저 속에서부터 들끓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미워하는 것도 쉽지 않다.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원망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복수란 더 어렵다. 악해질 수 있는 이들이 복수라는 악의를 자신의 가슴에 담으려 한다. 발악처럼 내뱉는 분노란 눈물보다 더 슬픈 통곡일 것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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