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의하면 유배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직 야인으로 머물러 있던 정도전(조재현 분)이 먼저 함주로 자기발로 찾아가 이성계(유동근 분)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벌써 한 번에 의기투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두 사람에게는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일 게다. 무엇이었을까?
사실 정도전은 그 이름값에 비해 정치적 술수나 책략에는 상당히 서툰 편이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상에 누웠을 때도 정몽주(임호 분)의 반격에 변변이 대처하지 못했었고, 이방원(안재모 분)이 자신을 죽이려 군사를 일으키는데도 그것을 사전에 인지하거나 대비하지 못했었다. 다만 스승인 이색과 동문인 이숭인마저 죽일 정도로 잔인하고 집요하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의 많은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외곬의 신념과 고집과 닮아 있었다.
이성계 역시 천생이 무장이었다. 신돈이 집권했을 때는 그 아래에 있었고, 이인임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이인임을 따랐으며, 최영이 이인임을 대신했을 때는 최영의 아래에 있었다. 여러 명문과 권세가들과도 혼맥을 맺고 있었다.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다른 의도가 없었기에 당대의 실력자들과 거슬리는 법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며, 그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조정의 명령에도 항상 복종하며 따른다. 왕이 바뀌고 왕조가 뒤집히는 동안에도 많은 관리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만 여전히 충실할 따름이었다. 어떤 불순한 의도도 어떤 다른 부정한 수단도 동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이성계의 주위로 사람이 모여든 이유다.
어쩌면 이성계의 아들들 가운데 이성계와 가장 닮은 것이 둘째인 정종 이방과일 것이다. 군공으로 따진다면 감히 이방원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산대첩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이인임을 공격할 때도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 욕심이 없었고, 수단을 부릴 줄도 몰랐다. 동생에게 떠밀려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형제간에 우애가 좋았었다. 주위에 사대부들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격변하는 고려의 정세만 아니었다면 이성계 역시 아들 이방과와 같은 삶을 살다가 그렇게 고려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드라마의 제목이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인 이유인 것이다. 이성계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조선을 일구었다.
고려말기의 혼란이 일개 무장에 불과하던 이성계를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돈이 실각하고, 다시 공민왕이 홍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우왕의 즉위초는 이인임의 세상이었다. 동북면으로 물러났다가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고려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며 다시 개경으로 불려오게 되었다. 왜구를 물리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명성을 쌓아가던 즈음 우왕은 최영(서인석 분)을 시켜 이인임 - 정확히는 임견미(정호근 분)의 당여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영은 이때 이성계를 선택하고 있었다. 최영마저 제끼고 나면 더이상 고려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에 반대하며 이성계가 내놓은 4불가론은 고려를 향한 그의 충심이었을 것이다. 굳이 이성계의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할만한 증거따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조선의 기록만이 이때부터 이미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확신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영은 이성계의 건의를 무시했고 고려를 위해서라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왕명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받은 자가 도리어 군사를 이끌고 왕을 공격하고 도성을 함락했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장차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지 모른다. 이성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왕은 폐위되어야만 했다. 우왕이 폐위되어야 한다면 창왕도 폐위되어야 한다.
바로 그때부터가 조선건국의 시작이었다. 그전부터 정도전에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왕조를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이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조차도 자신보다 서열이 위였던 조민수와 함께였다. 이전까지 동지였던 이색과 정몽주가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가장 친한 벗이자 오랜 전우였던 정몽주가 공양왕이 즉위하고 이성계의 병을 틈타 이성계의 무리를 공격했다. 사대부들도 입장이 갈렸다. 이성계의 주위에서도 이성계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왔다. 최소한 이성계의 주위에서 새로운 왕조의 건국이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지는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유학자로서 성리학의 원리를 이땅에 실현하는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유교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 한편으로 오로지 나라의 명령으로 침략해오는 적과 맞서싸우고 백성과 왕실을 지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같은 올곧고 소탈한 모습이 서로를 잡아끈 것이 아닐까. 당시 정도전이 꿈꾸었던 이상 역시 왕조의 교체보다는 고려의 근본적인 개혁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삿된 계산이 없다. 단지 세련되지 못하고 과격하고 거칠다.
멀리 돌아간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만남부터 매끄럽지 못하다. 거칠게 부딪힌다. 그러면서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이인임에 의해 이성계가 궁지로 몰리고 그런 이성계를 정도전이 구해낸다. 이인임은 당장 이성계가 무찔러야 할 적이 아니다. 이인임이 망쳐놓은 고려가 곧 이성계의 적이다. 이인임을 용인함으로써 이인임에 의해 고려가 망가지는 것을 받아들인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인임처럼 고려 역시 베어야 한다. 비로소 뜻이 하나로 모인다. 고려왕조가 자신을 버렸듯 이성계도 고려를 버렸다.
가장 권력이라는 것을 잘 깊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권력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쩌면 권력을 놓고 물러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임견미가 아니었다면 이인임은 물러나고 나서도 편안하게 천수까지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손에 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최영도 용인하고, 정몽주도 용납한다.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우왕을 충분히 경계하고 견제한다. 자신의 당여인 임견미를 질타한다. 이성계를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 권력에 의한 작위에조차 순리를 찾으려 한다. 노회하다는 것은 이런 때 쓰는 표현이다. 만일 그가 보다 전횡을 일삼고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려 했다면 이성계도 정도전도 그를 상대하기가 한결 편했을 것이다.
역시 최영에게는 이인임 또한 고려의 일부일 뿐이다. 이인임을 포함하는 것이 최영의 고려인 것이다. 물론 최영의 고려에는 이성계도 포함되어 있다. 이대로 모두가 좋게좋게 잘 꾸려나갔으면. 이성계가 감당해야 하는 희생보다 그로 인한 편안함만을 앞세운다. 대화와 타협은 방관이며 비겁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기에는 그는 나이가 너무 많다. 그의 고려는 완고한 기억 속에 멈춰서 있다. 시대와 함께 도태된다. 그 필연을 보여준다. 동북면의 백성들만이라도 아끼려는 이성계에 대해, 그들조차 단지 고려를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밑에 있었다. 이인임의 명령을 받을고, 이인임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다. 이인임의 아래에 최영이 있었고, 그 최영의 아래에 이성계가 있었다. 이제 비로소 이성계가 그 큰 뜻을 꺾고 이인임의 아래로 들어가려 한다. 역사대로 흘러간다. 이인임 - 아니 임견미가 틈을 보이고, 최영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준다. 때를 기다린다. 하늘이 정한 때를.
여전히 이방원과는 삐걱거린다. 수단이 좋다.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안다. 그러나 그 수는 정도전에 미치지 못하고, 그 뜻은 아버지 이성계와 비교할 바가 못된다. 경처 강씨(이일화 분)를 대하는 모습에서는 편협함까지 보인다. 정도전이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나라를 말할 때 그런 이방원의 모습이 겹쳐진다. 끊임없이 악연을 예고하고 있다. 필연이었다. 흥미롭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71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은 가득히 - 사기꾼의 아들과 딸, 지독히 닮아 슬픈 그들 (0) | 2014.03.04 |
---|---|
정도전 - 이성계의 선택과 두 번의 눈물, 마침내 껍질을 벗다 (0) | 2014.03.03 |
감격시대 - 일개 싸움꾼 신정태가 조선인의 영웅이 되는 이유 (0) | 2014.03.01 |
별에서 온 그대 - 외계인과 멜로, 특별한 설정이 전형성을 가리다 (0) | 2014.02.28 |
감격시대 - 먼 길을 돌아온 가야, 황방의 악의가 드러나다 (0) | 2014.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