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눈물을 흘린다. 상승불패의 명장 이성계(유동근 분)는 하루에 두 번 눈물을 흘린다. 이인임(박영규 분)의 앞에서 한 번, 그리고 다시 최영(서인석 분)의 앞에서 한 번, 지금껏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저버려야 했으며,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던 최영의 바람을 배반해야 했다. 이성계 자신이 만든 단단한 껍질이 한 순간 산산이 부서져내린다.
넋이 빠진 듯 그렁이는 눈으로 멍하니 이인임이 하는 말에 동의하는 이성계의 모습에 전율마저 느꼈다. 한 사람의 신념이란 곧 그 사람의 삶이다.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들이, 그 과정에서 겪어온 모든 일들이,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사유와 판단이 켜켜이 쌓이고 하나로 녹아 비로소 신념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자신은 고려의 신하이며 고려를 지키는 장수다. 피를 싫어하지만 고려를 위협하는 적이라면 마땅히 싸워서 무찔러야 한다. 피붙이와 같은 가병들이지만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내보내야 한다. 죽음을 슬퍼하고 죽임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설득하고 납득한다. 그가 끊임없이 속삭여오는 내면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이자 명예였다. 그것이 자신을 고려의 장수 이성계이게 했다.
이성계가 힘이 부치는 것을 알면서도 이인임과 싸우려 한 이유였다. 이인임의 고려의 적이었으니까. 이인임이야 말로 고려를 좀먹는 해악이었다. 이인임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장차 고려에 크나큰 해악을 미치게 될 것이다. 고려를 위해서. 고려의 백성을 위해서. 결국은 고려의 주인인 국왕을 위해서. 그러나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를 막아세웠다. 믿고 있던 정몽주(임호 분)도, 의지하던 최영조차, 충성을 바치려던 고려의 왕실 또한 그가 잘못되었다 틀렸다 말한다. 그리고 도리어 이성계 자신이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목숨 아니면 가진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선택이 주어지고 말았다. 고려를 위해서 자신은 여전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살아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무엇보다 대대로 다스려 온 동북면의 자신의 백성들과 병사들을 위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이인임과 타협해야 했다. 이인임의 존재를 용인해야 했다. 정도전(조재현 분)은 심지어 그런 이인임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 말하고 있다. 고려를 망칠 것을 알면서도 이인임과 한 편이 되어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선택해야 한다. 목숨인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인임을 적대하려는 자신의 신념을 꺾고 그와 한 편이 되는 것인가? 고려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기에 이성계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자신은 포기할 수 있지만 가족과 동북면의 백성과 병사들은 포기할 수 없다.
지금까지 지켜온 자신에게 작별을 고한다.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듯 내내 그의 눈시울은 젖어 있다. 자신을 죽이고 떠나보내는 것이기에 넋이 빠진 사람마냥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한 방울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이인임은 이성계의 눈물에서 현실에 굴복하고 만 자신에 대한 회한과 눈물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자신이 가진 현실의 힘 앞에 이성계가 자신을 굽히고 만 것이리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도전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최영을 만나서도 이성계는 눈물을 흘린다. 은인이었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같던 사람이었다. 고려최고의 무장이었고, 같은 무장으로서 항상 동경하며 우러러따르고 있었다. 이인임의 당여가 된 것에 대해서도 상관없다 말해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최영과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더라도 고려를 위해 최선만 다해준다면 그 또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노라 오히려 위로까지 해주고 있었다. 그의 친절함이 눈물겹도록 아프다.
고려만이 전부이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항상 선의와 성실함으로 사람을 대하고 고려에 한결같은 충성을 보이는 모습은 이성계가 그토록 바라고 되고자 했던 고려의 무장의 이상 그 자체였었다. 그러나 최영의 어리석을 정도로 올곧고 순수한 선의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지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인임이 고려를 위하지 않는데 어찌 그 당여가 되어 고려를 위할 수 있겠는가. 이인임이 고려에 해를 끼치는데 그 당여가 되어 그를 돕는다면 결코 고려를 위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이인임의 선의를 믿고자 하는 최영이기에 이인임의 당여가 된 이성계에게서도 그같은 선의를 기대한다. 배반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온다. 이인임을 아버지라 부르겠다는 우왕(박진우 분)의 선언에 이성계는 최영의 반대편에서 그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것이 이인임의 당여가 되었다는 의미다.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최영이 가엾고, 최영이 바라는대로 되어줄 수 없는 자신이 슬프다. 이제 다시는 최영처럼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최영의 꿈 또한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것을 알면서도 이인임을 선택했다. 최영에 대한 작별인사이며 최영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고려에 대한 작별인사였다. 최영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최영처럼 되고자 했던 자신에 대한 작별인사이기도 했다. 이제 헤어지고 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결심이 서지 않았다면 눈물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는 작별인사를 하려 한다.
시간나면 함주로 자신을 찾아오라. 자신도 개경에 오면 정도전의 집을 찾겠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눠보자. 정치가가 되었다. 칼은 웃음속에 감춘다. 평온한 얼굴 뒤에 격정과 욕망을 숨긴다. 정도전이 웃는다. 이성계가 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아는 때문이다. 정몽주는 고리타분하다. 그는 고려의 신하다. 단 한 순간도 고려의 신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정몽주와의 대화는 그래서 재미가 없다. 고려를 버리는 순간 그를 옭죄던 족쇄도 풀려버렸다.
의심했다면 끝까지 그의 모든 것을 빼앗거나,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면 그를 자극해서는 안되었다. 혈연이란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는 조카지만 마음만 달리먹는다면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된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도 욕심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인다. 결국 이인임의 어설픔은 그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이대로 죽여버리기에는 너무 큰 먹잇감이었다. 그를 자신의 손아래 둘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를 멸망시킬 괴물을 이인임 개인의 욕심이 끝내 깨우고 만 것이었다. 간신 이인임의 탐욕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그렇게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인임이 고려를 망하게 했다.
역사를 바로 이해하려면 여자를 보라.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여자를 보아야 한다. 아내가 누구인지. 누구와 결혼했는지. 근친혼이 터부시되는 정치적인 배경일 것이다. 결혼은 연대다. 결합이다. 근친혼이 잦아지면 한 집단의 부와 권력은 그 안에 머물게 된다. 반드시 왕씨의 왕비를 들여야 했던 고려의 왕실에 배해 다른 성씨에서 왕비를 구했던 조선의 왕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누구와 권력을 나누는가. 누구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가. 누구와 함께 권력을 강화하고 지키는가.
이성계의 셋째아들 이방의가 최영의 일족인 최인두의 딸과 결혼한 부분 역시 다루어졌으면 좋았을 뻔했다. 역사와는 분명 다를테지만 이인임의 당여가 되면서도 최영을 달래기 위해 그의 먼친척과도 사돈을 맺었다. 이성계의 용의주도함이 드러난다. 아니면 조금 나중에 그 부분을 집어넣을 계획이던가. 정도전의 조언이 있다면 드라마의 취지에도 맞을 것이다. 결혼을 통해 인척을 맺고 서로 필요할 것을 주고받는다. 결혼은 거래다. 자식이란 그를 위한 훌륭한 도구이며 자산이다. 이인임이 이성계가 제안한 혼담에 흔들리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는 거래보다 분명한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자는 자신의 당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거래란 철저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다. 자식마저 수단으로 삼는다. 그 비정함이 오히려 이인임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이성계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한다. 이인임에게는 이성계를 위협할 수 있는 현실의 힘이 있다. 이성계에게 자신이 줄 것이 있는 한 이성계는 마음놓을 수 있다. 결혼으로 맺은 인척관계보다 그것이 더 믿을 수 있다.
굼뱅이가 마침내 껍질을 벗고 매미가 되어 날아오르려 한다. 눈도 입도 귀도 없던 애벌레가 마침내 날개를 가지고 세상이 떠나가도록 큰 울음을 울려 한다. 탈각이다. 껍질을 벗는다. 성장도 변신도 아니다. 단지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솔직해졌을 뿐이다. 그것을 단지 연기로써 표현해내는 유동근에게는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다. 700년 전 상승불패의 명장 이성계가 있었다면 지금은 인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그려내는 배우 유동근이 있다. 하나하나 껍질을 벗으며 마침내 권력자의 얼굴을 한 이성계가 그 자리에 있다. 경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박진우의 이름을 기억한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마저 잃고 그 큰 궁궐에서 의지할 이 없이 혼자 견뎌야 했다. 태후조차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오로지 이인임 뿐이었다. 미성숙한 인격에서 오는 치기와 상처받은 자아가 짧은 순간 표정의 변화에서 그려진다. 어쩌면 실제의 우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인임을 아버지라 부르겠다 선언한다. 이인임은 아버지였다. 누구보다 그를 위해주고 그러면서도 따끔하게 혼도 내주는. 우왕의 정비에 대한 감정도 이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서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집착이었을 것이다. 이인임도 그것을 알았다. 우왕이 완성되었다. 하나의 시대가, 역사의 공간이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평면이 아닌 입체의 실제의 역사가 보여진다.
용이 깃들 연못을 찾았다. 용은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 왕에게 물은 백성이고, 신하에게 물은 왕이다. 정도전은 물이 될 수 없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담을 수 없다. 고여 있던 연못이 마침내 용에 의해 길을 찾고 바다로 흘러간다. 정도전이 조정으로 돌아간다. 정몽주와 명나라로 사신길에 나선다. 이성계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1부의 끝이다.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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