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말이우다... 그 욕심을 빼면 내는 왕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단 말이우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왕이 되고자 하는 것. 그래서 고민하고, 그를 위해 궁리한다. 어떻게 하면 왕위에 오를 수 있을까. 어떻게 세력을 모으고 지지자를 늘릴 것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로부터 협력과 동의를 구하며,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적대하지 않게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르고 나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명분과 이유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왕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익을 나눠준다. 자신이 왕이 된다면 무엇이 더 좋아지는가. 땅을 얻거나, 부를 늘리거나, 지위가 더 높아지거나, 혹은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되거나. 어떤 이상일수도 있다. 어떤 신념일수도 있다. 종교이거나 추구하는 가치일 수도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될 것인가. 수없이 많은, 어쩌면 서로 충돌하고 배척하는 다른 다양한 이익과 가치 가운데 무엇을 쫓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바로 그로부터 정책이 나오고 이념과 이상이 나온다.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곧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탄광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하려 한다.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광부와 그 가족을 위한 정책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 편으로 광산을 경영하는 사업주의 입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낼 것인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리 불필요한 고민들일 것이다. 고려의 왕이 되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이 될 것이 아니라면 그리 필요한 고민은 아닐 것이다.
결국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다. 그래서 관리들은 그 대책을 논의하고, 무장들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적을 찾아 목숨을 걸고 싸워서 물리친다. 굳이 왕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왕이 아니더라도 정책을 궁리할 수 있고, 왕이 되지 못했어도 병사를 이끌고 적과 싸울 수 있다. 자신이 아니어도 된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좋은 정책을 내놓고 또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면 백성들도 살고 나라도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왕이 되어야겠다고 말한다. 무슨 의미기겠는가.
정치인들이 그토록 좋은 정치, 훌륭한 정치를 위해 고민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정치인으로서 성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서 성공하여 권력과 명예와 지위를 손에 넣고자 그들은 기꺼이 자존심을 굽히고, 양심을 팔며, 온갖 더럽고 험한 일들을 견뎌내는 것이다. 몸은 축나고, 재산은 바닥나고, 가족까지 희생시켜가며 그들은 정치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좋은 정책은 그들의 무기다.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표로 잇기 위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시민과 사회를 위해서. 보편적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진정으로 그같은 이상과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란 극히 드물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치인을 만드는 것은 결국 국민이고 유권자다.
왕이 되고 나서의 일은 왕이 되고자 결심한 다음에 고민하면 된다. 왕이 되고 나서 무엇을 할까. 왕이 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정도전(조재현 분)이 있는 것이다. 정몽주(임호 분) 역시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이성계(유동근 분)의 선의까지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권근과 조준 같은 많은 사대부들이 있다. 조정에 출사해 있는 문신과 무장들 역시 그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빌려줄 터다. 왕이 될 이가 누리는 특권과 같은 것이다. 아무나 왕이 되고자 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도전이 스스로 왕위를 꿈꾸지 않는 이유이며, 최영(서인석 분)이 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결국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은.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욕심만 내면 된다. 결심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세력이 모인다. 그러면 그를 위해 고민하고 궁리해 줄 사람들도 모이게 된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고민해준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궁리해준다. 이성계는 단지 왕이 되어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기회와 여건을 만들고 그에 대한 보상 역시 확실히 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왕의 역할이다. 다른 것은 없다.
왕이란 어쩌면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덕을 말한다. 천명을 말한다. 왕의 신념이나 자질을 말하지 않는다. 왕의 능력이나 역할을 말하지 않는다. 왕이 되고자 해서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냥 왕이 되면 된다.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한다. 왕도정치다. 왕은 그저 어질고 현명한 이들이 제 뜻과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주면 된다. 그리고 이제 이성계에게도 정도전이 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다가온다. 하기는 그러한 고민을 해보았다는 자체가 이성계의 왕위를 향한 야심을 드러내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왕위에 관심이 없다면 그런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였다. 위화도에서의 회군만 아니었다면 이성계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계의 위에는 최영이 있었다. 고려의 실권은 최영의 수중에 있었고, 고려의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최영에 비해 이성계는 그를 상대할 힘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화도회군이 계기가 되어 준 것이다. 무장들 자신들부터 대부분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있던 터에, 그같은 균열을 봉합해야 할 최영마저 우왕에 의해 멀리 서경에 머물며 현장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빈틈을 비집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무장들을 설득하여 최영과 우왕에게 반기를 들도록 한다.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내쫓고, 그나마 위화도에서 함께 군사를 돌린 조민수마저 누르고 난 뒤에는 누구도 그를 견제할 상대가 없었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왕위를 꿈꿀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고려의 충신이고자 한다. 고려의 신하이고자 한다. 그렇게 스스로 믿는다. 하지만 정도전이 말한 것처럼 이성계는 고려의 충신이 될 수 없었다. 최영과는 달리 그는 고려에 빚이 없다. 고려에서 나지도 않았고 고려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고려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도 없다. 고려의 벼슬을 살며 고려의 군벌로써 조정의 명을 받들어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 여기에 병사들을 자신과 별개의, 일방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존재로만 여기는 조민수와의 차이도 드러난다. 동북면에서 이성계는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입으며 뒹굴었다. 이성계에게 고려란 최영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려왕실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같은 착각이 냉엄한 현실 속에 드러난다. 불가능한 싸움이고 그로 인해 고려는 망할 지 모른다.
망국의 충신이 되고 싶지 않다. 왕은 목숨을 걸었다. 왕위와 왕실의 존립마저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 개인의 사정이다. 고려가 곧 왕인 것은 아니다. 왕이 곧 고려의 백성 전부인 것은 아니다. 끝까지 충신의 가면을 쓰고 싶어하는 이성계의 이중성이 유동근의 탁월한 연기로 구체화된다.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다. 연기가 부족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닌, 연기가 너무 깊어 그 안을 다 들여다 볼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정도전은 아직 젊다. 생각하는 바가 모두 표정과 눈빛에서 드러난다. 과연 하나의 왕조를 세우는 건국왕이란 이런 사람을 뜻하는구나. 진실하되 가식적이고 이중적이다. 그 모순된 절묘함에 저도 모르게 공감하고 만다.
우왕(박진우 분)의 정치적 입지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이인임의 보호를 받아왔다. 이인임이 실각하고 최영과 군부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문세족은 고려의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최영과 최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군부의 존재가 그들을 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그들은 공민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향해서도 칼을 겨눌지 모른다. 우왕이 최영을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 고집을 부리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도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임이 사라진 우왕의 처지란 그렇게 고단하고 외로웠다. 최영의 부족한 정치력이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드디어 고비를 넘긴다. 딱 절반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역사는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특별한 고비도 없고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다. 조민수도 정몽주도 잠시의 위기로 지나칠 뿐이다. 그래서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싸움이 아닌 이상을 다루어야 한다. 몰아내야 할 적이 아닌 자신들이 세워야 할 새로운 나라의 이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이 정도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현실을 역사에 녹여 담아낼 것인가.
왕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혈통이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이 배워서 아는 것이 많아야 할 필요도 없고, 대단한 이상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 역설일 것이다. 훌륭한 왕이란 왕이 되고자 하는 왕이다. 어쩌면 공자가 말한 군자와도 통하는 개념일 것이다. 군자는 스스로 군자이고자 하기에 군자다. 왕이란 스스로 왕이고자 하기에 왕이다. 그것이 왕도다.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 그러나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무겁다. 의미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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