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과 계획은 종이의 앞뒷면이다. 모든 실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망상에 불과하다. 현실로 구현되었을 때 그것을 계획 혹은 비전이라 부른다. 구체화된 망상이 계획이 되고, 현실성을 잃은 계획이 망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다.
얼마의 예산을 생각했던 것일까? 어느 정도의 스케일로 몇 주에 걸쳐서 방송할 계획이었던 것일까? 배우들은? 스태프는? 시청자를 배신했다. 게를 판다고 간판을 걸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내놓은 것은 게맛살이었다. 공식홈페이지의 내용들에 기대를 가지고 드라마를 보았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드라마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드라마의 시작부분에 상하이매 신영출이 감옥에서 출소하는 장면이 있었다. 감옥에서 나와서 가장 먼처 찾은 것이 신정태(김현중 분)와 그의 여동생 청아였다. 신정태와 청아도 조선땅에서 태어났다. 신의주에 숨겨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연들로 인해 가족을 떠나고 돌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신영출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족의 곁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다시 가야의 친아버지 신죠의 죽음과 얽히며 신의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신정태부터 사람이 달라져 있다. 정의감 넘치는 열혈의 싸움꾼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 남짓이다. 혈기가 가라앉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 책사처럼 책략을 꾸민다. 음모와 계략으로 상대를 궁지로 내몬다. 홈페이지에 예고되어 있던 등장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아예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사라졌다. 싸울 상대가 없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상대가 없으니 싸움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도 보이기 쉽지 않다. 정재화(김성오 분)를 힘겹게 꺾었는데 정재화를 이긴 왕백산(정호빈 분)은 상당히 수월하게 이긴다. 이유는 없다. 그냥 된다.
작가가 바뀐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다. 작가마다 잘 쓰는 내용도 각기 다르다. 어떤 작가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열혈남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떤 작가는 뒤에서 계획을 세우고 모략을 꾸미는 스타일을 즐겨쓰고 잘쓴다. 그런데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나눠서 쓴다. 처음부터 함께 궁리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작가가 쓰던 작품을 이어받아 나머지를 대신해 쓴다. 기존의 작가가 나름대로 의도해서 설정하고 구성했을 텐데 그것이 전혀 의미없이 되어버린다. 이어받더라도 기존의 작가가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가 산으로 간다.
제작여건도 바뀌었다.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대로라면 제작사에는 더이상 새로운 캐스팅을 할 여력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가 바뀌어 혼란스러운데 현실적인 문제로 캐스팅까지 전부 재검토해야 한다. 캐릭터 돌려막기가 시작된다. 기존의 캐릭터에 질서없이 여러 다양한 역할들이 부여된다. 대표적인 것이 도꾸(양태구 분)다. 이전에 보여주던 얄미우면서도 우스꽝스고, 악역인데도 자신도 모르게 연민이 가던 입체적인 캐릭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여러 역할을 수행하느라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어정쩡한 모습이 되어 있을 뿐이다. 남은 것은 고작 평안도 사투리 하나 뿐이다.
김옥련(진세연 분)은 어떨까? 가야(임수향 분)처럼 김옥련에게도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신정태를 향한 그녀의 올곧은 마음이 더욱 강하게 와닿을 수 있었던 것일 터다. 가수의 꿈도 있었다. 결국 가수로 데뷔하는 했다. 무대에서도 서 보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곁다리다. 그녀의 꿈은 오간 데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모습이 철없어 보이면서도 당차기까지 하던 것에서 그저 흔한 비련의 여주인공 이상은 아니게 되어 버렸다. 김옥련이 신정태를 휘둘렀지 신정태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만일 신정태를 대신해 죽을 수 있다면 김옥련은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가야와의 감정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이 급하게 정리되고 만다. 아니 그녀의 아버지 신죠를 죽인 진범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서 데려오겠다던 약속이 깡그리 잊혀지고 만다. 억울한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다. 가야를 운명으로부터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의 대결구도가 단순화되면서 가야의 역할 역시 한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변화를 보이기에는 그녀의 비중이 너무 커졌다. 상하이 일국회의 보스일텐데 그녀가 흔들려버리면 드라마가 함께 흔들려 버린다. 그래서 신정태와 황방이 머리터지게 싸우는 동안에도 일국회는 비중이 거의 없었다. 가야와의 이별을 말할 때 얼마나 허무했던가. 이별을 말하기에는 그들 사이에 서사가 없었다.
일국회의 칼이라 불리우던 칼잡이 신이치(조동혁 분)가 가야를 대신해 일국회에서 축출되고 황방 방주 설두성(최일화 분)의 암살을 시도하다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무통을 무기로 삼는 위험한 해결사 아카 역시 신정태와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황방의 부방주이자 최고수이기도 한 왕백산과의 싸움은 허무할 정도다. 차라리 모일화(송재림 분)과의 대결은 단동 최고수이자 소림권의 달인과의 대결답게 치열했다. 싸워야 할 적들마저 사라진다. 황방과의 싸움에서도 왕백산과의 싸움은 신정태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볍게 제압하고 역시 황방을 무너뜨릴 꾀를 생각해낸다. 적들이 사라진다. 더이상 신정태에게 싸울 적이란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새로운 적도 없다.
그래서 비어버린 드라마를 채우는 것이 결국 말이다. 액션보다는 노력도 덜 들어가는 말로써 모든 것을 해결해보려 한다. 일국회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도, 황방을 끝내 무너뜨리고 마는 것도 결국은 말이다. 심지어 신정태가 황방을 찾아온 순간 그나마 황방에 남아 있던 조직원들은 신정태가 푼 독을 먹고 모두 죽고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참을 싸워야 했을 텐데 왕백산과의 싸움까지 한꺼번에 쉽게 끝내고 말았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듯 등장인물들의 말로써 드라마를 창조해가고 있느 것이다. 당연히 재미는 없다.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었다면 모를까, 더구나 경쟁자도 없이 신정태가 꾸미는대로 족족 걸려들고 만다. 인간이 아닌 신이다.
설마 싶었다. 거기서 김옥련을 죽일까. 너무 뻔하다. 그래서 아니라 믿었다. 아무리 그런 뻔하다 못해 식상한 - 그렇다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장면을 넣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를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여자를 위해 분노한다. 차라리 혼자몸으로 황방을 찾아가 목숨을 걸었다면 더 보기가 좋았을 뻔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겨우 목숨을 구해 다음을 기약한다. 아니면 신정태를 뒤따라온 방삼통패와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일국회로 인해 힘겹게 승리를 거둔다. 승리는 아니다. 일국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정재화(김성오 분)의 재등장은 돌려막기의 진수일 것이다. 가야와 아오키(윤현민 분)을 대신할 일국회의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 미처 생각 못한 듯 일국회가 가진 장부에 협박당해 조계경비국장은 아오키를 풀어준다. 아무리 자신과 관련한 장부로 협박을 당한다지만 바로 코앞에서 목숨까지 위협하는데 너무 약세인 것도 어색하다. 새로운 인물이 일본 군부의 실력자이고 그로 인해 경비국장은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그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어째서 하필 그 자리에 정재화가 있는가.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모일화 역시 필요한 곳에는 언제나 있으며 드라마의 막힌 곳을 뚫어준다. 그래서 드라마가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확실히 총체적 부실일 것이다. 규모를 생각지 않았고, 역량을 계산할 줄 몰랐다. 얼만큼인지 어느정도인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온갖 소문들이 흘러나온다. 배우들이 아쉽다. 배우들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망상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역량을 갖추지 못한 가운데 만들어지는 것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아쉬움 뿐일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어리석고, 준비를 못했다면 무능하다. 그런데도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방송에 내보냈다. 일단 시작만 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해결될 것이다. 무모할 뿐이다.
청아의 존재가 밝혀진다. 그러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캐스팅이 되어 있는가의 여부조차 알 수 없다. 도꾸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행동들은 의도된 것이었을까. 작가에 의해 또다시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 신정태의 복수와 일국회의 반격과 황방의 몰락까지. 길은 먼데 분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
호쾌한 액션을 기대했었다. 피냄새 땀냄새 나는 거친 남자들의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멜로도 기대했었다. 진세연은 예쁘고 임수향은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다. 배우들의 면면도 기대를 더욱 키웠다.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왔다. 지나온 시간들이 아깝기만 하다.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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