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내는 역적 아니우다!' 역사에 떠밀리는 이들의 눈물

까칠부 2014. 4. 6. 09:56

정몽주(임호 분)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이성계(유동근 분)의 공요군이 왕명을 어기고 도성인 개경을 공격하게 된다면 그 뒤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왕은 반역한 신하를 용납할 수 없다. 반역한 신하는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최선은 이인임(박영규 분)과 같은 권신이 되어 왕을 끼고 권력을 누리는 것일 테지만, 그러나 이성계는 그보다도 한참을 더 가고 말았다.


이성계도 알고 있었다. 대세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의 군권이 이성계의 손에 쥐어졌다. 이인임도 실각하고, 최영(서인석 분)마저 제거되고, 더 이상 고려에서 이성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음에도 상황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이성계 자신은 가만히 있으려 하건만 주위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벌써부터 정도전(조재현 분)과 아들 이방원(안재모 분)이 대업을 설득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자신의 야망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추악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이성계가 끝까지 정몽주를 살리고자 했던 이유가 드라마적으로 표현된다. 믿어주고 있었다. 믿지 않음에도 믿어주려 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음에도 믿어주마고 말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이성계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믿어주고 있는 사람이다. 정몽주를 향한 눈물이었다. 자신을 향한 눈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에 흘리는 눈물이기도 했다. 이성계가 안쓰럽고, 고려가 안쓰럽고,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이성계로 하여금 개경공격을 포기하라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정몽주마저 눈물짓게 한다.


인상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주도하여 꾸몄던 회군이었다. 회군하여 고려를 장악하고 마침내 대업을 이루라. 도성에서도 사대부를 중심으로 회군을 지지하는 여론을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우왕(박진우 분)의 판단은 최대한 적은 피로써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던 정도전의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우왕의 판단까지 정도전이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개경에서의 시가전. 그는 바로 자신의 집 마루에서 공요군과 방어군이 피를 흘리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신이 의도한 상황이건만 역사는 무심하게도 그조차 방관자로 만들며 흘러간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로지 하늘에 달렸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무장들이 최영의 요동정벌에 회의적이지 않았더라면. 이성계가 우군도통사가 아니었고, 최영이 우왕에게 잡혀 위화도가 아닌 서경에 머물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마지막 순간 우왕과 최영이 공요군의 회군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니 정도전의 주장대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바로 회군하여 서경에서 우왕과 최영을 잡았다면 그래도 역사는 지금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역사란 수없이 많은 우연들의 집약체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이 지금에 이른다. 작은 변수 하나로도 역사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주인공이라 여기는 자신조차 그같은 많은 작은 변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의도한다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떠밀리고 만다. 만고의 충신으로 오로지 고려와 왕실과 국왕만을 위하며 살았으나 이제 고려도 왕실도 국왕도 무엇하나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최영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시대의 격랑은 너무 크고 거세다. 시대에 휩쓸려 사라지는 순결함이란 언제나 비장한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 상승불패의 명성도, 고려를 위한 충심도, 그러나 무엇도 지킬 수 없었다.


이성계가 아마 말위에서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런 것일 게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대해서.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써 벌어져버린 상황들에 대해서. 아무 상관없이 장수와 병사들은 필사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죽는다. 그 가운데 이유를 알고서 죽이고 죽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당사자인 자신은 말 위에서 한 발 물러나 지켜보고 있고, 어쩌면 전혀 상관도 없을 장수와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다. 비정함일까? 모순일까? 무력감일 것이다. 굳이 공요군 앞으로 나서는 최영과 칼을 맞대려는 이유다.


"내는 역적 아니우다!"


그것은 운명에 떠밀리지 않겠다는 이성계의 의지와 같은 것이었을 게다. 정몽주를 만나며 흘린 눈물과 같다. 자신의 의지대로 따르겠다.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이루겠다. 평생을 자신의 주인으로써 살아온 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성계를 역적으로 만들고 조선의 태조로 떠받들고 만다. 이미 역사는 그렇게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치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바로 이성계가 하고 있는 그것이 정치다. 정치가 곧 중용이다. 진실과는 상관없다. 정의와도 상관없다. 모두가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납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면서도 시간을 들이더라도 충실히 명분을 쌓고 난 뒤 군사를 움직였다. 누가 보더라도 이성계와 공요군은 회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개경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공격명령을 내리기보다 왕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확인하고 최영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아니 그러는 동안에도 최영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성계에게 인심이 모이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성계에게는 인의가 있다. 이성계는 믿고 따를만한 사람이다.


어쩌면 정도전이 말한 정치란 행정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정치라기보다는 통치다. 정치란 대등하거나 최소한 대등하다 간주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율이고 조정이다. 협상과 타협이다.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믿도록 만든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반드시 그랬어야만 했다고 동의하도록 유도한다. 힘으로 누르거나, 아니면 이익으로써 유혹하거나, 그도 아니면 논리로써 설득하거나. 그런데 정도전은 그같은 정치에는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다지 정치에 능숙한 모습은 보이지 못한다. 모략이나 책략은 정치가 아니다. 고려를 일신할 수 있는 탁월한 정책들 역시 정치의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정도전의 한계다. 그것을 알고서 일부러 그렇게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사소한 오류인지.


고려와 조선의 마지막 싸움이었을 것이다. 늙은 고려와 젊은 조선 과의 세대교체였을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조선의 건국은 반역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조선의 건국은 천명이었다. 고려의 구신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다. 최영처럼. 마지막 노익장으로 조선의 새로운 군주가 될 이성계와 맞선다. 고려의 마지막을 보내는 심정으로 이성계가 그를 향해 칼을 뽑는다. 고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흐름을 이제와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징적이었다. 두 사람의 정의가 시린 칼날을 사이로 첨예하게 부딪힌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스케일이 있는 전투장면을 한국드라마에서 보게 되리라고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있었다. 과거 '대조영'을 비롯 스케일과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전투신을 보여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대부분이 KBS에서였다. 그동안 맥이 끊긴듯 싶더니만 이렇게 새롭게 정통역사드라마로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개경의 시가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치열한 전투라니. 아쉽다면 여전히 개인무술의 비중이 너무 크다. 전투라기보다는 곡예에 가깝다. 마지막 야간전투에서 목책을 사이에 두고 창만을 겨누고 찌르는 우악스런 장면이 눈에 밟힌다. 날아차기를 하는 화려한 액션보다 이쪽이 더 전투의 치열함을 담아낸다.


어쩌면 창이 너무 짧은 탓일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짧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선의 창 역시 기본이 10척 - 3미터에 이르고 있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진형을 이루고 창만으로 적과 대치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창은 너무 짧아서 칼에 비해서도 길이에 따른 이점이 거의 없다. 곧잘 난전으로 치닫고 마는 이유다. 아직까지 한국의 제작진이나 시청자의 눈에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액션이 더 멋있어 보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헬리캠을 통해 보여지는 개경의 시가지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는 한국 역사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아쉬움이 두드러지는 것은 만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원래 경처 강씨(이일화 분)와 이방원은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조선을 세우기까지 오히려 서로 협력하는 입장이었다. 비로소 그 과정이 나온다. 이제까지 이방원은 너무 철이 없었다. 경처 강씨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도 너무 소홀하다. 강씨와 그의 일족이 조선건국에 끼친 공도 결코 작지 않았다. 이성계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씨 - 즉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앉히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이방원이 철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강씨가 철이 없다. 도움이 안되고 있다.


당위와 합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때로 자신의 정의에 도취되는 경우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생각하게 된다. 요동을 당연히 정벌할 수 있으리라. 회군한 공요군을 당연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지나치게 순결한 충성심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올곧고 충성스럽지만 영활하거나 지혜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영의 눈물에 가슴이 울컥하는 것은 그같은 순수함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때문일까. 동시대에서도 최영의 죽음에 시장을 받을 정도로 인심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열연에 TV가 타버릴 것 같다. 이성계와 정몽주가 마주하고, 최영이 다시 이성계와 맞선다. 우왕과 최영이 마지막 작별을 나눈다. 어쩌면 가장 잘 형상화된 우왕일 것이다. 어리석지만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이인임이 있었고 최영이 있었지만 우왕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본다. 항상 뿌듯하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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