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얻으려 한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하나를 버림으로써만이 비로소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있다. 이른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 하는 것일 게다. 닫힌 계에서 전체의 가치가 일정하다면 누군가 일정한 가치를 소유하는 만큼 그만큼의 가치를 댓가로 내놓음으로써 전체의 균형을 유지한다. 더 요긴하고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지려 한다면 더 요긴하고 더 소중한 가치를 댓가로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 간절한 소망이며 필사의 신념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절대 타협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댓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명초의 거유 방효유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유학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9족에 이르는 친족과 10족이라 일컬어진 자신과 일찌기 교유한 바 있는 제자와 친구들이 모두 자신의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었다. 일가의 모든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될 것을 알면서도 조선초의 사육신 역시 모진 고문에도 세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온몸이 찢겨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가지려 해서가 아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서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저토록 처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탐욕은 타협이 가능하다. 욕망은 절충될 수 있다. 원래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일부만 얻어도 경우에 따라 충분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의 것이었다면 양보란 곧 손해를 뜻할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전부와 같은 것이라 한다면 자기의 전부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도전(조재현 분)이 말한 '정치에서 초심을 빼면 권력욕만 남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탐욕 뿐이다. 수단이 되어 버린다. 전제개혁이든, 아니면 고려를 지키겠다는 충심이든.
그래서 그토록 안타까운 것이다. 반드시 전제개혁을 이루고 싶다. 계민수전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정몽주(임호 분)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하나 놓아왔을 것이다. 공민왕은 정도전에게 아들인 세자를 부탁하고 있었다.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던 시절도 있었다. 유학자로서 유가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젊은 유학자들에게 괴팍할 정도로 엄격했던 선배이고 스승이었다. 권근, 이숭인, 하륜 등은 그 시절 뜻을 함께하던 동지이기도 했으며, 이색은 항상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고마운 스승이었다. 이제는 평생을 함께 해 온 아내조차 자신의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은 것은 아직 지켜야 할 더 소중한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몽주 역시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 대한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계(유동근 분)만 다시 돌아와준다면 정도전 역시 예전의 정도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고려를 바꿔보겠다며, 썩어빠진 고려를 제대로 된 나라로 만들어 보겠다며 의기투합하던 그 시절의 정도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도전과의 오랜 우정을 포기해가면서까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무엇이 있었다. 고려를 지키고, 고려의 왕실을 지킨다. 선비로서, 유학자로서, 고려의 신하로서,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본분을 지킨다. 그를 위해서라면 정도전과 적대할 수도, 그를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려왕실을 지키고자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우왕과 창왕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골을 부수고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고 각오였다.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고려이고 왕실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인 자신을 외면한다. 아버지의 잘못을 꾸짖으며 자기가 그 죗값을 치르겠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차라리 그 모습이 선해서. 그 말과 행동이 진지하고 진실해서.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인가. 그렇게까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역시 오랜 친구인 정몽주까지 찾아와 설득한다. 예전의 이성계로 돌아와달라고. 고려의 신하이던 이성계 '장군'으로 제발 돌아와 달라고. 이인임이 일찌기 경고했던 괴물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아들마저 등돌려가며 과연 대업을 이루어야 하는가. 오랜 친구와 원수가 되어가면서까지 대업이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인 것인가.
그깟 왕따위. 결국 자신을 찾아와 무릎까지 꿇은 정몽주에게 이끌려 정도전과 약속했던 계민수전의 이상마저 현실을 위해 양보하고 타협하려 한다. 모두를 가지고 싶다. 아들 이방우(강인기 분)도, 오랜 친구인 정몽주도. 어쩌면 그것이 더 소중하다. 왕이라고 하는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자신의 피를 받은 아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 대의보다 자신을 찾아와 진심을 다해 설득하려 하는 정몽주가 더 소중하다. 서운할 만도 하다. 정도전과는 필요에 의해 만난 같은 목적을 공유한 단지 동지적 관계였다면, 정몽주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진심을 나누고픈 그야말로 '친구'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깨닫게 된다. 이제 더이상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권력이 탐욕스러운 이유다. 역사의 수레바퀴라 흔히 비유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미 한 번 놓아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죽어버린 사람은 다시 살아올 수 없다. 한 번 맺은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를 원망하며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틈을 보인다면 원망은 곧 칼이 되어 자신을 상처입힐 것이다. 자신만이 아닌 가족과 친구, 주위의 모두가 그로 인해 피해를 입고 만다. 무엇보다 이렇게 끝나버릴 것이면 그동안의 희생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가. 정도전의 아내도 말한다. 그렇게 사람이 죽었는데 세상이라도 바뀌어야 한다고. 이성계는 물론 정몽주 자신도 이제와서 이미 시작된 역사의 흐름을 막아 세울 수는 없다. 그동안 치러야 했던 댓가 때문에도 놓아버리거나 포기할 수 없다. 끝까지 가야만 한다.
계민수전인가, 단지 사전혁파인가. 정도전과 조준(전현 분)의 입장이 갈리는 부분일 것이다. 반드시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어차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백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에 과전법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전혁파와 계민수전의 이상을 공유하고는 있었지만 그 절박함이 서로 달랐다. 여전히 거리로 나가 굶주린 백성과 부대끼며 교감하고 있던 정도전에 비해 조준은 정치가이고 행정가였다. 효율도 중요하다. 현실적인 여러 여건들도 살펴야 한다.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단지 적은 세금만을 거둬들인다면 백성들에게도 충분히 이익이다. 그러나 백성의 소유가 아닌 토지는 결국 왜곡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우려는 오래지않아 현실화되고 만다. 물론 드라마의 이야기다.
정치란 절충이다. 정치란 정의다.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옳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정치다. 설사 조금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최대한 타협하고 양보하여 공존을 꾀하는 것이 정치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논쟁일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 후자는 전체 사회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치를 전제하고 있다. 전자는 정치의 주체 개인간의 관계를 전제한다. 사소한 문제로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까지 상하고 싶지는 않다. 적대하거나 원한을 갖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당위가 있다. 역시 정도전과 조준이 마지막 순간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다. 정몽주를 배려하고, 반대파의 인사들을 배려한다. 이성계 역시 자신의 앞에 무릎까지 꿇은 정몽주를 배려한다.
가차없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이야 말로 지금의 고려의 현실에서 가장 옳은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를 막아서는 것은 모두 적이고 악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반대한다고 해서 죄를 주고 벌을 주는 것은 폭거에 다름아니다. 정몽주가 정도전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유다. 정의를 그렇게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정치가 다르다. 정도전의 정치는 전쟁까지 포함한 정치다. 정몽주의 정치는 전쟁을 배제한 순수한 정치다. 이제 비로소 정몽주 자신도 눈을 뜬다. 정치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정도전이라는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마침내 조선의 3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이방원(안재모 분)을 위한 복선이 매우 친절하다. 문득 상상해 본다. 역시 이인임이 경고했던 그 괴물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권력을 향한 탐욕이다. 아예 닿지 않을 먼 곳에 있으면 모르되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면 없던 욕심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다지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 꿈을 꾸어보게 된다. 왕이 되는 자신을 그려본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장면이다.
지켜야 하는 것들을 위해 모두가 절박하다. 치열하다. 그러면서도 놓아야 하는 것들을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혈육의 정을. 오랜 인연을. 애닲은 감정들을. 지켜오던 굳은 신념까지도. 그렇게 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정도전도 차마 정몽주를 탄핵하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게 머뭇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벌주고, 원수가 되어가면서까지. 정치를 보여준다. 인간과 정치의 이야기다. 가장 간절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에 그들은 무모해지기도 하고 잔인해지기도 한다.
정몽주에 대한 묘사가 사실 매우 아쉽다. 정도전에 뒤지지 않는 급진파였다. 개혁파였다. 단지 고려를 향한 입장만이 달랐을 뿐이다. 공양왕 즉위까지 그래서 그들은 동지였었다. 마냥 사람 좋은 모습으로만 나온다. 역사의 우화다. 그를 통해 깨닫는 바가 있다. 가장 급진적인 정도전과, 보수를 대변하는 듯한 이색(박지일 분)과,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정몽주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 자신과 자신이 놓인 현실을 비춰본다. 드라마는 재미있어야 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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