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 혹은 잊고 싶어하는 진실일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위쪽 세계의 사람들일 테지만, 정작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절대다수는 바로 아래쪽 세계의 사람들이다. 적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정의한다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이 아무리 굴지의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토록 자신들이 무시하는 아래쪽 세계의 사람들에게 물건을 만들어 팔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자신들만의 정교하고 세련된 룰을 가지고 있었도 정작 그 룰이 적용되는 세계는 좁다. 그같은 자신들만의 룰을 공유하는 세계에서만 그것들을 통용된다. 그 한계를 넘어서고 나면 그곳에서 적용되는 것은 허술하고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보편의 룰이 적용된다. 사람의 룰이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기에 가져야 하는 당연한 도리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렵다. 자신들도 역시 그 인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여지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단순히 도구다. 강성욱(엄효섭 분)에게 딸 강진아(정소민 분)가 그렇다. 정략결혼을 위한 수단이다. 정략결혼은 장차 자신과 자신의 기업에 작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강동석(최다니엘 분)에 대한 집착은 혈육에 대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일구어 놓은 현성을 물려줄 대상에 대한 것인가. 하기는 한국사회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한 구분은 그리 쉽지 않다. 강성욱이 아니면 전혀 다른 성씨의 피조차 이어지지 않은 누군가가 자신의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 현성이야 당연히 자신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회사돈을 빼돌리고 회사의 유능한 인재들을 자신의 일가족의 일상을 위해 소모하고 있는 것일 게다.
"아아, 그 링 네 게 아니지. 내가 네 손에 직접 끼워주기 전까지는 말이야."
물론 맞는 말이다. 프로포즈 반지다. 당사자가 없는데 프로포즈도 받지 않고 반지를 먼저 낀다는 것은 어색하다. 하지만 이 말에는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다. 강동석이 생각하는 소미라(이다희 분)와의 결혼의 의미다. 그녀가 자기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절대 대등한 동반자로서가 아닌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회사를 위해 마음껏 발휘하는 소미라가 아닌, 단지 자신과 자신의 일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소미라가 전제된다. 태연히 소미라를 위협하고 협박까지 한다.
그 반대편에 선 것이 김지혁(강지환 분)이다. 중산층 이하를 대상으로 하는 중저가브랜드다. 그런데 그런 옷들을 전혀 입을 일 없어 보이는 이들이 모여서 패션쇼를 한다. 옷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다. 아니 단지 옷을 매개로 더 큰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옷은 소외된다. 지난주 참치캔을 세일의 미끼상품으로 선정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작 참치캔 자체의 품질은 배제되었던 것과 같다. 다만 의도는 좋았지만 결국 비즈니스란 그쪽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 김지혁의 한계일 것이다.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강지환의 과장된 연기가 때로 불편하다. 마치 어릿광대와 같다. 하지만 그래서 감탄한다. 갑작스레 씌워진 사장이라는 자리,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가족이라는 인연, 무엇보다 굴지의 대재벌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신분의 변화가 너무 어색하다. 주눅이 들어 아예 움츠러들거나, 아니면 억지로라도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거나, 시장상인들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르다. 강동석을 상대로 진심을 이야기할 때도 전혀 표정이나 몸짓들이 다르게 보여진다. 불안과 공포,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발버둥. 익숙해지면 다를 것이다. 다음주 예고편에 보이는 그 장면이 그 상황을 뜻한다면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힘들었다. 꽤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김지혁의 심리를 연기해 보인다.
당연하게 요구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거부당할 것을 아예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소미라의 여동생 소혜라(윤소희 분)을 대하는 냉정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무관심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김지혁을 만나고 짧은 시간만에 그의 성격에 대해 파악하고 만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인 양 인간을 멀리에서 관찰한다. 인간이란 자신을 위한 단지 유용한 수단이며, 그것에만 오로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과장하지 않는 담담함이 김지혁과 강동석 두 사람의 거리를 보여준다. 룰을 지배하는 자의 당당함이다. 아무렇지 않은데 벌써부터 불꽃이 튄다.
인간의 룰과 세계의 룰이다.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의 룰을 결정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원시적인 인간의 룰을 지키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인간의 세계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허름한 단칸방을 찾아 앙상한 노인의 손을 쥐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다. 기부는 않더라도 그들이 쓸 수 있는 저렴한 상품들을 직접 생산하거나 수입해서 판다. 그들 역시 인간의 세상에 머문다. 기억나게 한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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