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믿음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진실이 존재하는 한 그 진실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또한 존재할 것이다. 마치 수학처럼 이미 나와 있는 결론을 다시 거꾸로 거슬러서 그 원인과 과정까지 모두 재구성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아직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어딘가에는 그를 위한 단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추리라고 하는 장르가 나타나게 된 배경이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 '파운데이션'의 주인공 해리 셀던이 그랬던 것처럼 충분한 단서만 주어진다면 수학적 계산을 통해 수백 년 뒤의 미래까지 얼마든지 예측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주어진 단서들을 통해 감춰진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설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더구나 그 진실이 정의롭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악을 응징하고 억울한 이들을 돕는다.
그런 점에서 변호사란 경찰이나 탐정과 같은 추리물의 단골주인공들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위치의 직업일 것이다. 범인을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범죄를 밝히고 범인을 체포함으로써 악을 응징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같은 것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의뢰인만을 보호한다. 의뢰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혹시 모를 부당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자신의 지적능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진실을 밝히고 개인을 보호해야 할 법과 국가기관이 무능이나 혹은 다른 이유로 개인을 궁지로 내몰았을 때 마지막 기댈 수 있는 보루와 같은 것이 바로 변호사인 것이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개인을 구하는 히어로인 것이다.
김석주(김명민 분)가 거의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근접해 있었으면서도 정작 진범으로 의심되는 윤태영의 신병이나 그의 범행수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래서다. 범인을 잡고 구체적인 범행에 대해 밝혀내는 것은 바로 검찰이 해야 할 일이다. 범인을 체포하여 구체적인 증거들을 확보한 뒤 법정에 세워 그에 합당한 처벌을 이끌어낸다. 반면 변호사의 역할이란 의뢰인이 받고 있는 부당한 혐의를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전적인 추리물이 시간과 공간을 제한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한다면 변호사는 그 한계를 특정함으로써 타당성을 강화한다. 진범이 누구인가까지 밝히는 것은 과잉서비스다.
진범이 윤태영인가 아닌가는 김석주나 정혜령(김윤서 분) 입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필요한 다른 누군가가 밝혀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정혜령 자신이 무죄인가. 무죄라면 그를 입증할 다른 증거가 존재하는가. 그 증거들을 찾아나선다. 조각나고 왜곡된 증거들을 취합해서 원래의 모습을 복원해낸다. 정혜령을 범인으로 몰았던 현장에서 들린 목소리나, CCTV의 시간, 그리고 피해자의 손톱에 남은 DNA가 김석주의 노력에 의해 하나하나 반박된다. 법이 원하는 정혜령을 무죄로 만들어 줄 증거들을 법의 전문가인 변호사 김석주가 찾아내 그녀를 위한 진실을 재구성한다. 바로 그 과정에서의 짜릿함이다. 마침내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무죄가 입증되었을 때 통쾌함마저 느끼게 된다. 개인이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야 말로 정의다. 시청자 역시 그같은 수많은 개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일일 수 있다.
역시 놀라운 것은 치밀함일 것이다. 하나하나의 단서들을 그 헛점을 찾아 재구성해나가는 집요함이었을 것이다. 과연 국내최고의 기업전문 변호사다운 탁월함이었을 것이다. 검찰이 놓치고 지나친 것들을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 단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는다. 치열한 법논리는 그 다음이다. 법은 진실에 봉사한다. 진실은 항상 약자의 편에 선다. 신화다. 환상이다. 하지만 그래서 드라마는 성립한다. 변호사는 법을 통해 진실을 쫓고 억울한 개인을 지키는 존재다.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도구이던 법이 변호사 김석주를 통해 약자의 편에 선다. 정확히 권력이나, 명예, 돈과 같은 것들이 아닌 인간 자신의 편에 서게 된다. 인간의 길에 들어섰다.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이유가 있어 회피하고 도망친다. 도망친 그곳이야 말로 더 지독한 지옥이었다. 과거가 지워졌을 때 그를 그렇게 만든 이유들 역시 지워졌다. 조금씩 숨고 도망치던 흔적들 역시 지워졌다.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인가. 인간을 둘러싼 무엇인가. 결국 남은 것은 아이와 같은 순수함. 하고 싶어 하고, 해서 즐겁기에 한다. 인간의 순수를 연기해낸다. 순수 그 자체가 된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깊이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너는 누구인가. 그는 김석주다. 그가 진짜 김석주다.
시간이 짧다. 그만큼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촘촘하게 배치되어 조금의 낭비도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이지윤(박민영 분)의 활달함이 숨쉴 틈이 되어준다. 법보다 상위의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에 맞서기 위한 장영우(김상중 분)의 선택, 그리고 해맑은 웃음을 찾은 김석주의 순수함까지. 결국 법은 한 인간을 구원한다. 진실이 한 인간을 구해낸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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