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몽주 - 아! 정몽주,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다!

까칠부 2014. 5. 25. 06:24

젊다는 것은 내일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들에 빚진 것이 적은 만큼 오로지 내일만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다. 그래서 과감하고 때로 무모하다. 어느새 시간들에 빚을 지고 나면 도저히 떨칠 수 없는 미련이 생겨나게 된다. 나이를 먹으면 그래서 겁이 많아진다.


정몽주(임호 분)는 고려였다. 아무리 고려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 마음을 다잡아 먹었어도 나고 자란 곳이 곧 고려였다. 먹고 입는 것들이 모두 고려에서 났고, 더불어 어울리고 사귄 것이 모두 고려사람들이었으며, 뼈가 굳고 뜻을 세운 모두가 고려 안에서 이루어졌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도 결국은 보다 나은 고려를 만들겠다는 생각의 연장이었고 보면, 고려에서도 아름답고 좋은 것은 모두 그대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욕심이었다. 좋은 것은 모두 그대로 가져가고 안좋은 것들만 모두 새로운 세상에 맞게 바꾸고 싶다.


그것이 정도전(조재현 분)의 미련이었다. 이성계(유동근 분)의 집착이었다. 선양을 받는다. 아무런 다툼이나 갈등 없이 순리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다. 고려의 백성이 그대로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고, 고려의 관리들 또한 다른 문제만 없다면 새로운 왕조를 위해 가진 바 실력과 경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히려 젊고 실력있는 인재들마저 나태와 무능과 탐욕에 물들어버리게 만들던 것이 고려의 모순이고 부조리였기에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나라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정몽준과 같은 청렴하고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춘 어진 선비들을 위한 나라여야 했다. 새로운 나라의 중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몽주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방원(안재모 분)은 아니었다. 정도전처럼 뼛속까지 고려사람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성계처럼 고려인으로 인정받고자 필사적이 되었던 변경인으로서의 경험도 적다. 아버지는 고려에서도 변경인 동북면의 토호이자 군벌이었고, 그런 한 편으로 자신은 일찍부터 개경에 머물며 유력한 인사들과도 교유해 온 당당한 고려의 주류신분 가운데 하나였다. 정몽주를 죽이라 사람을 보내고 혼자 방안에 앉아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이 딱 이방원이 고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미련의 전부였던 셈이다. 당장은 설득을 시도해보겠지만 그래도 소용없다면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정몽주를 죽일 수 있다.


정몽주의 죽음이 지나칠 정도로 처참하게 묘사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예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한 번에 깔끔하게 목숨을 끊기보다 여러 번의 칼질로 아예 온몸을 난자하고 있었다. 고려의 운명이 이와 같다. 순응하지 않는다면 댓가가 따를 것이고, 만신창이를 만들어서라도 남은 필요한 부분만을 가지면 그만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미 죽은 정몽주를 다시 살려낸 것도 다름아닌 이방원이었다. 고려의 충신으로 죽게 만든 그를 다시 조선에서도 고려의 충신으로 영원히 살도록 만들었다. 정몽주의 시호인 문충을 내린 것도 다름아닌 이방원이었다. 설사 죽였더라도 다시 살리면 그만이다. 왕에게는 그런 권력이 있다.


어쩌면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대해서 이성계나 정도전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왕이 가진 힘에 대해서. 왕이 되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지금이야 충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도 사육신이란 임금을 거역하고 심지어 시해까지 모의한 역적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단종을 지키려 했던 신하들은 모두 죄인이 되고, 단종을 폐위시키고 끝내 죽음으로 내몬 이들은 공신이 되고 충신이 되었다. 왕이 곧 명분이다. 왕이 곧 정의다. 일단 왕위에만 오르고 나면 사소한 잘못들은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 정몽주를 죽이고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왕이기 때문이다.


각오가 부족했다. 이성계나 정도전이다. 순진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의 속성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주변의 인물들인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이방원은 일찍부터 개경에서 권력의 핵심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권력에 대한 이해를 키워오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다. 힘을 가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이다. 아무리 아깝고 안타깝고 아프더라도 필요하다면 베어야 한다. 권력욕이라기보다는 당위다. 실제 조선이 건국되고 조선건국에 반대하던 권근과 이첨, 하륜 등의 정몽주의 당여들은 이방원의 수족이 되어 그가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조선건국에 반대하던 이들이 조선안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조선권력의 핵심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것이 권력이다.


남자, 아니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 남녀간의 그것보다 더 애닲고 더 처절하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다. 매몰차게 자신을 거절하는 이를 무릎까지 꿇고 사정하며 매달린다. 못된 말만 하고 매번 상처만 주는데도 차마 그를 저버릴 수 없다. 투정이다. 그래서 몽니라 했던 것이다. 앙탈이라 말했던 것이다. 짐짓 센 척 거친 척 정몽주를 몰아세우고, 심지어 술에 취해 그를 죽이겠다 고함까지 지르는 모습이 마치 짝사랑에 실패하고 술김에 화풀이하는 누군가의 모습과 너무나 겹쳐보인 때문이었다. 끝끝내 꺾이지 않을 정몽주의 완고함에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적이라며 쫓아보내고도 결국 그 뒤를 쫓아 그가 나간 방문에 기대 혼자서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랑이 이보다 아프고 애처로울까?


다만 사랑의 대상이 달랐다. 정몽주에게도 이성계나 정도전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다. 선지교에서 자격을 만나기 직전 정몽주가 떠올린 것 역시 이성계와 정도전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었다. 끝까지 같이 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간 사랑은 단지 추억으로 남을 뿐이지만 지금의 사랑은 이미 운명으로 여겨지는 법이다. 차라리 고려와 마지막을 함께할지언정 그들과의 우정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들과의 우정은 단지 마음에 간직할 뿐 그를 행동케 하는 건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다. 그것을 알기에 이성계는 운다.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성계는 목놓아 운다.


어떤 멜로보다 진한 멜로였을 것이다. 어떤 사랑보다도 비극적이고, 어떤 연인보다도 처절하다. 운명은 잔인하기만 하다. 그것이 어느새 머리도 희끗한 남자들 사이의 로맨스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누군가에게 반하고, 그래서 모든 진심을 담아 사랑하고, 그리고 운명에 의해 끝끝내 헤어지고 만다. 아니 아예 원수가 되어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차마 못할 짓이지만 해야 한다. 이성계를 죽이려던 정몽주의 단호함이 차라리 슬픈 이유다. 이성계를 만나러 가면서 가슴에 품었던 칼은 이성계를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고려에 대한 사랑을 위해 이성계의 자신에 대한 감정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이성계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행동이다.


오해했었다. 혹시라도 막다른 궁지에 몰린 정몽주가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으로 협박한다. 친구인 정도전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지막이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 이성계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 이상 무엇도 되돌리거나 막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정몽주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대의와 어긋난다. 전장에서 죽음과 맞대며 살아온 이지란(선동혁 분)조차 암살을 그토록 꺼려한다. 정당하지 못하다. 칼이란 정몽주 자신의 의지다. 옳지 못한 것을 잘라내고 바르지 못한 것을 끊어낸다. 아니라면 기꺼이 죽겠다. 정해진 죽음 앞에서도 그는 단지 분노할 뿐이다.


체념이다. 어쩌면 마지막 혼란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스럽다. 


"고려의 충신으로 죽게 해주어 고맙다고 전해주게."


아니면 다른 결말이라도 있었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역시 이미 예정된 결과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라리 고려보다 먼저 죽게 되어 다행이다. 고려가 아직 남아 있을 때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의 품에서 죽을 수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곧 뒤따라올 고려이기에 고려에 대한 걱정은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렇게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비로소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너무나 버겁던 자신의 짐을 내려놓는다. 마지막까지 감지 못하고 흡뜨고 있던 피투성이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그렇게 하나의 역사가 저물어간다.


대하드라마 '정몽주'는 이렇게 끝이 났다. 임호의 연기내공이 수백년만에 정몽주를 현실로 불러냈다. 어쩌면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역사속 정몽주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온화하지만 단호하고, 침착하지만 가슴에 불을 품고 있다. 유동근의 이성계와 마주하고서도 조금도 눌리는 느낌이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서릿발같은 의지가 시린 칼날처럼 파고든다. 다른 정몽주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피투성이가 되어 누운 그의 얼굴을 보며 눈시울이 화끈거린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극의 무거움이다. 역사가 현실이 된다.


정몽주가 죽었다. 더 이상 고려에 이성계를 막을 사람이 없다. 정몽주 만큼의 명성과 인망과 역량을 갖춘 이가 더이상 고려에는 남아 있지 않다. 예정된 수순대로 역사는 흘러간다. 잔혹할 정도로 무심하다. 누가 죽든, 누가 살든, 누가 울고, 누가 슬퍼하든, 결국은 그렇게 역사에 의해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고 언젠가는 죽어갈 것이다. 무심한 자연처럼. 그럼에도 예정된 결말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곧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이야기다.


과감하고 잔인하다. 냉정하고 단호하다. 인정을 끊지 못하면서도 죽여야 한다는 당위를 주저없이 쫓는다. 인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앞에는 단지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태종이 되기 전의 이방원이다. 과연 안재모다. 역사가 그로 인해 급히 흐르기 시작한다.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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