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이방원의 애증, 정도전 이인임과 만나다!

까칠부 2014. 6. 15. 07:52

바로 저기에 내가 있어야 했다. 내 자리였다. 원래 나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혁명의 동지였다. 민본의 대의를 나누어 품고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함께 넘기고 있었다. 밤을 지새가며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며 대업을 이룬 그날을 그렸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대업이 이루어진 지금 그곳에 나의 자리는 없다. 아버지와 공신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는데 정작 그곳에 지금 이방원(안재모 분) 자신의 자리는 없다.


여우가 외친다. 


"저건 분명 시고 맛없는 포도일 거야!"


정작 정도전(조재현 분)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오히려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계승하여 완성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을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하가 아닌 정도전을 증오한 것이었다. 정도전을 반대한 것 역시 자신의 신하가 아니기에 반대했다. 아버지 이성계(유동근 분)가 정몽주의 왕이 되고자 했었던 것처럼 이방원 역시 언젠가 정도전의 왕이 되어 그와 함께 대의를 이루어가는 그 순간을 꿈꾸어 왔었다. 그것을 냉정하게 거절한 정도전에 대한 애증이기도 할 것이다.


안재모의 연기력 때문이다. 단순히 이방원 자신의 변명처럼 역겹다거나 불쾌한 감정만으로 그 모습을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이방원의 표정에 깃든 불편함은 그보다는 동경에 가까웠다. 실연이고 비련이었다. 자기가 가져야 했고, 그러나 자기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고 안타까움이었다.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더 독하게. 더 야무지게. 그것은 증명이었다. 자기를 거부한 자들에 대한 증명. 그의 곁에 모이는 이들은 원래의 동지들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이었다. 아이러니다. 세상에 자기 혼자 남은 것 같다. 상실과 고독과 분노의 감정이 과장되지 않은 표정과 몸짓 속에 격류처럼 소용돌이친다.


정도전의 사상이 가지는 한계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있어 이성계와 정도전은 그야말로 모범이라 할 만하다. 군주는 신하를 심지어 자기 자식보다도 더 믿고 아끼고, 신하는 그런 군주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인다. 자신이 주장한 총재정치를 몸소 실천에 옮기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정작 왕이 하고자 해서 정도전이 비판하거나 반대하고 나선 경우가 거의 없다. 결국은 따른다. 왕을 위한 최선의 대안을 내놓아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하륜(이광기 분)의 말처럼 이성계의 믿음과 사랑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정도전과 조준(전현 분)의 입장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일 것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적당한 긴장이 필요하다. 임금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기꺼이 신하는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신하를 임금은 어려워야 하고, 신하 역시 임금과 가까워지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아니 신하와 신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인정과 욕심이 섞이면 결국 냉정을 잃게 된다. 냉정을 잃으면 중심을 잃고, 중심을 잃으면 올바른 판단도 어려워진다. 이성계의 천도주장에 사실상 지지의사를 밝힌 정도전에게 좌시중으로서 자신의 관직에 어울리는 예우를 해달라 요구하는 이유였다. 더 이상 동지는 없다. 공적인 관계로서 좌시중과 문하시랑찬성사라는 관직만이 있을 뿐이다. 혁명동지가 아닌 새로운 조선의 신하로서 자신의 직품에 충실해야 한다.


임금에게는 임금이기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들이 있다. 예라 부른다. 예란 질서다. 질서란 곧 권위다. 각자의 역할과 책임에 비례해 주어지는 의무다. 구분에 따라 벽을 쌓고 거리를 둔다. 그것은 공적인 관계다. 왕이니까. 신하니까. 직급에 따라서도 또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 벽이 허물어지고 거리마저 사라진다.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인정이나 친분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라면 객관성마저 사라지고 만다. 당장 임금이 신하를 아우라 부르며 거리를 없애자 그를 질투하며 불평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임금의 지나친 신임이 신하의 주제를 잊게 만든다. 어쩌면 정도전의 파국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도전의 총재정치가 가지는 치명적인 한계이며 모순이다. 군주의 마음이란 날씨와도 같다. 맑다가도 흐리고, 흐리다가도 맑으며, 해가 쨍한데 문득 소나기가 퍼붓기도 한다. 조광조를 중용한 것도 중종이었도, 조광조를 죽인 것도 결국 중종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위해 공신들을 견제하라고 구성군을 남겨주었지만 예종은 공신들과 손잡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구성군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고 있었다. 전적으로 군주의 절대적이고 안정적인 인정과 신뢰가 뒷받침 될 때만 가능한 것이 바로 총재정치일 텐데, 그러나 군주의 마음이란 믿고 의지하기에는 너무 변화무쌍하다.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무엇보다 군주 자신이 총재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도전 자신이 조정의 모든 실권을 주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성계가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잠시라도 정도전을 의심하고 그를 견제하고자 했다면 그는 그는 조정의 실권은 커녕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쉬웠다. 그래서 정도전도 세자인 이방석을 지지하기로 한 것일 테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경계하는 것처럼 이방석의 후손 가운데 그런 생각을 가진 이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당장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했던 조선이지만 숙종이 전에 없이 완벽한 정통성으로 그것을 흔들고자 하는 순간 여지없이 동요되고 만다. 영정조를 거치며 탕평에 의해 왕권을 중심으로 재편된 권력은 이후 세도정치라는 기형적인 형태로 발전하고 만다.


결국 정도전이 조준을 대하는 모습처럼 혁명동지로써 이성계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정도전의 총재정치인 것이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길 때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전제왕조인 것이다. 봉건사회다. 사람이 지배한다. 사정전에서의 연회는 바로 그런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정도전이 서두르는 이유다. 이성계의 나이가 많아 시간은 부족한데, 세자가 아직 어리니 갈 길은 멀기만 하다. 무엇보다 정도전 자신이 이제 예전 같지 않다. 이 가운데 하나만 어긋나도 정도전의 꿈은 그대로 꿈으로 끝나고 말 뿐이다. 불안하고 위태하기만 하다. 그의 이상처럼.


결국 또다른 자신과 마주치고 만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닮은 이숙번과 그때 이인임이 그랬던 것처럼 길에서 마주치고 만다. 그런 이숙번을 자신의 손으로 칼집을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든다. 자신의 대의를 위해.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한 자신의 이상을 위해. 그토록 혐오하던 이인임과 만난다. 물론 정도전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그를 위해 무고한 선비를 피투성이로 만들었을 때 자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가를. 거울을 보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기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 줄만 안다.


갈 길이 급한 정도전 앞에 주원장이 보낸 선물이 도착한다. 이방원을 위한다지만 사실은 그냥 의심많은 주원장의 찔러보기였다. 고려를 의심하고 이성계를 의심했듯 이번에는 정도전을 의심한다. 성리학을 숭상하고 사대를 기본으로 삼는 조선에서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보통 정치적인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죽을 줄 알면서도 자기가 직접 갈 수도 없다. 틈이 벌어진다. 정도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틈이 이방원과 하륜 앞에 그 치명적인 속살을 드러내고 만다. 하륜이 말한 기회다.


어쩌면 하륜은 알았을 것이다. 정도전이 지금 무척 급하다는 사실을. 무척 난폭해져 있었다.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이성계의 신임만 걷어낸다면 정도전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성계가 여전히 그를 신임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불신을 그 위에 드리우면 된다. 운이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안요인이었다. 하륜이 기다리던 정도전의 틈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가쁘게 흘러간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믿고 이해해주는 사이라는 것은.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관계다. 공적인 관계는 공식적이어야 한다. 말해야 하고 자료를 남겨야 한다. 근거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총재란 국가의 공무를 맡는 관직일 것이다. 무심코 조준을 대하며 보인 허술함이 그 한계를 드러낸다. 단지 아직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삶의 정점에서 추락을 남겨둔다. 비감이란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일 것이다.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