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은 살아간다. 앞이 안보여도. 귀가 안들려도. 말을 못해도. 팔다리가 없어도. 베토벤은 귀가 안들리는 상황에서도 명곡을 썼다. 걷지도 못하면서 군대를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손빈과 다치바나 도세츠 같은 이들도 있었다.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다리 대신 휠체어를 밀며 농구를 하고, 앞도 안보이는데 지팡이에 의지해 혼자 길을 걷기도 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기보다 이타가 더 쉬울 수 있다. 핑계일 것이다. 누군가로 인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래서 최호와도 억지로 키스도 하고 같이 잘 계획도 세우고 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이성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자신이 어색하고 이상하기만 하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물론 사랑하고 싶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아무나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호는 실패했다. 최호가 실패한 것을 장재열(조인성 분)은 몇 번 만에 성공하고 있었다. 하기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거의 비슷하다. 아무리 멋지고 매력적이고 조건까지 좋다고 반드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여러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들마저 사소하게 여겨질 때 그것을 사랑이라 일컫는다. 여전히 섹스는 상상도 하기 싫지만 어쩐지 이 남자 장재열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장재열의 고백은 지해수(공효진 분)의 섹스와 같다.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꾹꾹 누른 채 혼자서만 간직해 왔던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본능은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조동민(성동일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미탈의 존재를 듣고 막혔던 입이 다시 트여 버린 장재범(양익준 분)처럼. 자신의 화장실까지 보여준다. 자신만의 안전한 도피처이던 화장실안 침실을 지해수에게만은 공개하고 있었다.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바로 이 여자라면. 장재열이 지해수에게 분노한 이유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거절당했다. 유일한 진심이었다.
장재열의 흉내를 내고. 장재열의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을 애써 흉내내며. 형으로 부른다며 이런저런 요구들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설레는 자신의 감정이 낯설고 두렵다. 그래서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를 못살게 굴기도 한다. 박수광(이광수 분)에게 장재열은 닮고 싶은 어른이었을 것이다. 그를 따라하며, 그를 흉내내며, 그 또한 어른이 되려 한다. 욕망도 감정도 절제할 줄 모르는 그는 사회적 아동에 가까운 처지다. 장재열 역시 상대를 배려하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무지다. 박수광 역시 사회적으로 이미 상당기간 격리상태에 있었다. 사람 관계가 서툴다.
아이의 죽음에 대해 남편탓을 한다. 어째서 아이는 죽어가고 있느데 남편은 낮부터 술을 마시고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는가. 하지만 아내가 진정으로 원망하고픈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다. 엄마가 되어 아이가 죽어가는데 마트에 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원망과 죄의식을 남편을 향한 원망으로 바꾼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의 사랑이 그녀가 견뎌낼 힘이 되어준다. 그래도 이 사람이 있다. 동정하고 연민하며 보듬으려 한다. 그가 기대게 한다. 자신으로 인해 그가 살 수 있다. 아내와 새로운 자식에 대한 부담으로 자신의 팔을 자르려 한 남편이지만 그들 역시 서로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장재열을 원망하며, 장재열에게 모든 탓을 돌리며, 한 편으로 연민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감정이 장재열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러면서 이유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장재열 자신이 이유가 된다. 그토록 꺼려하고 거부하던 키스도. 섹스도. 사랑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와의 키스가 좋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장재열이니까. 장재열이라서. 어머니마저 잊는다. 자신조차 잊어 버린다. 때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랑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장재열은 그토록 많은 사랑들을 해왔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긍정 모든 것이 그의 사랑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람둥기가 되어야 했던 이유다. 순결한 바람둥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상처는 남고 만다. 상처란 아픔의 흔적이다. 상처를 보는 순간 아팠던 순간의 기억들이 깨어난다. 트라우마다. 그래서 정신적 외상이다. 치유되지 않았다. 여전히 상처는 남아 있었다. 상처가 기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들이 여전히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토록 노력해 왔음에도. 잊여보려. 이겨보려. 벗어나 보려. 그 아픈 기억마저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후 드라마가 풀어갈 숙제일 것이다. 어설피 다가오는 것이 있지만 기대를 온전히 남기기 위해 일부러 잊는다. 그 상처마저 지울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
장재범이 장재열을 공격한다. 조동민에게서 아미탈을 훔쳐내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장재열의 목에 깊숙이 꽂아 넣는다. 그의 진실을 듣고 싶다. 하필 장재열이 지해수의 고백을 받고 그녀와 만나려는 순간에. 지해수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막 도착하려는 그때에. 장재열에게 구원이란 없다. 영원히 영겁의 윤회를 헤매며 고통받게 될 것이다. 저주일 것이다. 과연 장재열에게서 장재범이 바라는 진실이 들려지게 될 것인가. 새로운 나락이다. 진정한 지옥이다. 만일 반전이 없다면. 드라마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한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로 돌아가 어린 자신의 곁에 있어줄 수 있다면. 다른 어른들이 해주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그것을 어른이 된 자신은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의붓아버지에 의해 폭행당하는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향해. 상처투성이의 가엾은 그들을 위해. 어렸을 적 자신으로부터 위로받는다. 어렸을 적 자신을 위로한다. 어린 자신을 위해 기꺼이 싸우기도 한다. 상처는 그의 훈장이다.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를 바라보지 않는다.
지해수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이 된 자신이 아닐 것이다. 지해수 자신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필요하다. 그때 어머니는 그녀를 버려두고 있었다. 그녀 혼자만 외롭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지해수가 자기의 부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녀의 상처를. 그녀의 아픔을. 비로소 어머니에게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도안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에 사로잡혀 외면하고 있던 딸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무엇일까? 그 답은?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다. 모두가 같지는 않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같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상처와 서로 다른 아픔을 가지고 서로 다른 답을 찾아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살아가게 된다. 부딪히고 깨져가며. 때로 울고 비명도 질러가며. 다시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 걸음이 곧 희망이다. 그러나 과거의 망령이 그 희망을 붙잡는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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