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지만 왕의 적장자를 가리키는 공식호칭은 원자다. 그리고 군호를 따로 받지 않고 바로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원손에서 세손으로, 다시 세자로, 그리고 바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던 단종의 경우도 군호가 따로 없었다. 노산군은 단종이 폐위되고 난 뒤 세조에 의해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세자로 책봉될 적장자에게 '대군'이라니?
더구나 세자는 될 수 있으면 어린 나이에 책봉하는 것이 옳았다. 세자로 책봉되고 나면 장차 보위를 이을 이로써 그에 어울리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왕학은 오로지 왕위에 오를 단 한 사람만을 위한 특권이고 또한 의무였다. 무엇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기에 왕의 유고시도 대비해야 했다. 확실한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가 비게 되면 그로 인해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왕이 개인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국가의 중대한 행사였다. 그 형식 역시 책례의라는 이름으로 엄격한 법도로써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역시 조선을 배경으로 쓰여졌던 가상역사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이 이와 같은 오해를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해를 품은 달'이 호평을 들은 이유는 실재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배경이 되어준 조선에 대해서도 역시 허투루 여기지 않았던 엄밀함 때문이었다.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그것을 드라마적인 재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차라리 중국의 어느 왕조였다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바쿠후나 한슈였어도 그다지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나 이전의 다른 왕조를 배경으로 했어도 괜찮았다. 하필 조선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구축된 조선의 체제 안에서 보다 엄밀하고 철저하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나름대로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줄거리부터 만들고 배경과 설정을 거기에 끼워맞춘다. 그럴 것이면 하필 조선을 배경으로 삼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굳이 시대물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현대를 배경으로 기업드라마를 만드는데 CEO가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증자부터 하고 있다. 자기 사람으로 채우겠다고 대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친구를 계열사 사장으로 앉히고, 주주총회장에서 주주들과 주먹다짐을 한다. 평사원인데 회사 안에서 당당히 CEO의 이름을 부른다. 물론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알려진 조선이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는 모를 것이라 자신한 것일까?
설정이란 작품의 전제이며 또한 한계다. 관객과의 약속이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조선이어야 한다. 현대의 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현대의 기업문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의 기업문화와 일본의 기업문화는 전혀 다르다. 미국의 기업문화 역시 많이 다를 것이다.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다.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그것이 작품속 인물들과 인물들의 관계, 또한 그들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배경'이 되어 준다. 같은 원작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도 한국의 그것과 일본의 그것은 그래서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계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기업을 배경으로 삼으려 한다면 넘어서는 안되는 일정한 선이 있다. 그 선을 전제할 때 반전도 일탈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설정만 한국 기업을 배경으로 한다 말하고 일본과 미국의 기업을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라 이름은 조선인데 전혀 조선다운 무엇도 느낄 수 없다.
조선의 왕이니까. 조선의 왕자니까. 조선의 무장이니까. 조선의 왕이기에 갖는 신분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조선의 왕자이기에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런 한계가 한 편으로 긴장감을 주며 드라마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단지 이름만 조선일 뿐이다. 이름만 조선을 빌려썼을 뿐 작가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나라다. 그렇다면 그를 위한 충실한 설명이 필요하다. 혹시라도 오해가 없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조선이라는 이름만 던져 놓으면 그것을 조선이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아주 몹쓸 드라마는 아닌데 그런 점들이 드라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정작 조선이 조선이 아니다. 조선의 왕도 조선의 왕자도 전혀 조선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설정이 흥미롭다. 시놉시스 역시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캐스팅도 나쁘지 않다. 약간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름이 없지는 않지만 어차피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드라마일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마땅히 가져다 써야 한다. 연기력은 다음 문제다. 다만 아쉬운 것이다. 배경이 조선만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 조선이 그 조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황후'역시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허구의 인물과 이야기라 밝혔음에도 항상 역사와 비교되고는 했었다. 처음부터 주의가 필요했다.
다른 요소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지간하면 작가를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엄밀하게 배경이나 설정과 조화시킬 것이냐가 문제다. 실재하는 시대라면 더욱. 실재하는 공간이었다면 더더욱. 실재했던 인물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무겁고 무서운 일이다. 아쉬운 까닭이다. 너무 쉽게 쓰여진 것 같다는 것이 드라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재미있게 보는 것을 방해한다. 어쩌면 더 재미있는, 더 의미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말했다시피 아주 재미없지는 않다. 오히려 흥미로운 요소들이 더 많다. 약간은 유치한 듯한 특수효과마저 드라마만의 개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뻔한 설정과 내용들은 장르적 클리셰로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같은 개성강한 드라마가 한국드라마에 존재한다. 나름 큰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마무리의 실패가 전체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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