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1
오랜 그 옛날 하늘 파랄 때 엄마 되고픈 그 하얀아이
인형머리 매만지는 커다란 눈망울과 그 조그만 손
그땐 땅이 초록이었고 냇물이 진한 노랑이었지
하늘아 땅아 그댈 아니 냇물아 나의 아이야
그 파란 하늘아 초록빛 땅아 그땔 아니
냇물아 오 나의 아이야
저녁 노을이 슬픔 주는듯 하얀 아인 멀리 가버리고
홀로 남은 인형만이 내 기억속에 남아 있네
하늘아 땅아 그땔 아니 냇물아 나의 아이야
그 파란 하늘아 초록빛 땅아 그땔 아니
냇물아 나의 아이야 그 파란 하늘아 초록빛 땅아
그땔 아니 냇물아 오 나의 아이야
김태원이 예능에 나와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이 노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째서 이토록 비장하고 처절한가. 심지어 누군가는 윤회하여 다음 생에 이르러 이전의 생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했었다.
"오랜 그 옛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리 오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그리도 멀고 흐리기만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이다. 멀어지기만 할 뿐 다시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하나씩 잊혀져간다. 하나씩 놓아두고 잃어간다. 불과 얼마전 일인데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것은 어느새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다.
"하늘 파랄 때"
이 가사는 뒤의 '그땐 땅이 초록이었고, 냇물은 진한 노랑이었지"와 이어진다.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파란색은 특히 하늘이라는 단어와 만났을 때 투명함과 순수, 그리고 희망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편안함이고 안락함이다. 굳이 '오랜 그 옛날'이라 일컬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태초의 편안함이고 안락함이며, 순수이고 희망이었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 이전의 생을 돌아보는 듯하다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대를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아마 김태원 자신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그리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린 주변의 환경과 학교에서의 적응실패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 좌절과 공포에 대해서. 학교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연필냄새조차 맡기 싫어했었다. 억삼이라는 별명은 그처럼 위축된 자신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주위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김태원 자신의 자아는 거짓의 뒤에 숨어 주위와 벽을 쌓으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다치지 않으려. 더 이상 아프지 않으려. 그런 김태원에게 그나마 행복했던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보다 더 나이를 먹고 나서도 아픈 사랑의 기억은 더욱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김태원더러 다시 이 노래의 가사를 쓰라 한다면 이와는 전혀 다른 가사가 나오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랑도 만났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둘이나 낳았다. 음악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수단이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그를 인정해주는 이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과 같은 선명한 파란 빛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하늘 역시 제법 봐줄만한 빛을 띄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희망이라는 것도 있다. 굳이 두꺼운 커튼을 치고 꿈에서나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잠에 기댈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너무 어렸었다.
대책없는 희망처럼 극단적인 절망에도 빠지기 쉬운 것이 바로 그 무렵이다. 그래서 질풍노도다. 한없이 밝고 힘차고, 한 편으로 끝없이 어둠고 우울하다. 하기는 그래서 음악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기에.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들이 안에서 넘쳐나고 있었기에. 그리고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면서 사실 더 큰 절망과 좌절에 빠지고 마는 음악인도 적지 않았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고갈되어가는 자신에 대한 환멸과 혐오가 또다른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딱 20살 초반에 쓰기에 적당한 곡이고 가사다. 지나고 나면 철없던 시절의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진심이다.
"엄마 되고픈 하얀 그 아이"
역시 하얗다는 순수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 하기는 나 또한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떠올리려 하면 어쩐지 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유난히 흰 피부에 눈과 머리는 선명한 검은 빛이다. 아직 어려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 깊어 보이던 동네 개천도 고작 정강이도 차지 않는 정도였다.
아마 역시 김태원 자신이 어느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 한 바 있는 그의 첫사랑 가발집 딸이었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슬픔 주는 듯 하얀 아이는 멀리 가 버리고"
이 역시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저녁 노을이 슬픈 이유는 해가 지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도 해가 지면 엄마가 찾아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그렇게 부모의 손에 이끌려 먼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만다. 헤어짐의 슬픔보다 헤어짐으로 인한 빈 자리의 공허와 상실감을 이야기한다. 홀로 남은 인형처럼 그저 그 시절의 기억만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김태원의 가사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흔히 예로 드는 부분일 것이다.
"그땐 땅이 초록이었고, 냇물이 진한 노랑이었지"
아마 이 가사를 두고 어떤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초록빛 땅과 진한 노란색 냇물. 하지만 굳이 초현실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붉은색 태양과 파란색 나무, 사람보다 작은 집. 마침 물감이 그것밖에 없어서이기도 했고, 아직 세상을 구체화시켜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아마 땅이 초록인 것은 풀을 그리려 한 것이고, 냇물이 노란 색인 것은 파란 물감이 없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이 파란색인 것은 하늘은 파래야 하니까.
오랜 그 옛날은 과언 언제쯤을 말하는가? 하얀 그 아이는 대체 몇 살 쯤 되었을까? 엄마가 되고팠다는 것도 결국은 아이들이 즐겨 노는 소꿉놀이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엄마가 되고, 또 아빠가 되고, 그림을 그리면서는 땅을 초록으로, 냇물을 노랑으로, 그리고 어쩌면 아이의 손에는 인형이 들려 있었을 것이다. 하얀 옷을 입었을 것이고 피부도 하얀 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미지를 몽타주처럼 나누고 다시 조립한다. 평면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해체하여 입체로 다시 재구성한다. 어릴적 첫사랑인 여자아이를 추억하는 한가운데에서 그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자신의 기억이기도 하다.
순수가 자칫 무지나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하늘과 땅의 색은 따로 있다. 모두가 냇물이라 여기도록 하려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색으로 칠하지 않으면 안된다.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 구애되지도 않는다.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는다. 파란 색이니까 파란색이다. 초록색이니까 초록색이다. 노랑색이어도 자기가 그렇게 여기므로 그다지 상관이 없다. 애써 누군가를 설득하려고도 납득시키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인 것. 그런 솔직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역사상 수많은 인류의 지성들이 그토록 아이를 닮고자 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떠나오기는 쉽지만 돌아가기는 어렵다.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부르는 것도 아니다. 묻는 대상은 하늘이다. 땅이다. 냇물이다. 순수의 증거들이다. 순수하던 시절. 아직 더렵허지지 않은 기억 속에. 아무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던 어린 시절의 낙원에 대한 집착이다. 어쩌면 에덴이란 인간의 잠재의식속에 남은 그들이 떠나온 순수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어 버린 그 기억을 돌아갈 수 없는 먼 시간의 저편에서 다시 그리고 외쳐불러본다. 다음생에서 이전의 생을 돌아본다. 어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은 음산할 정도로 비장하고 처절하다. 김태원의 그로울링이 섞인 코러스는 더욱 무겁고 절박하게 들린다. 하늘 저 너머에 닿을까. 땅 저 깊은 곳에 들릴까. 1집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음반제작의 전권을 보장받은 김태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저질러 버린 결과였다. 이런 귀신이 들릴 것 같은 노래가 주류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당시의 음악환경이 가히 경이적이기까지 하다. 제법 성공했다. 김태원이 대마초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1집에 이은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 음악인들이 음악적 영감을 위해 약물에 기대는 것을 이해해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음악이다. 2집 전반이 그렇다. 이처럼 음산하고 음울하고 처절하고 비장미 넘치는, 듣는 사람마저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 것 같은 음악이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키델릭이다. 그래서 트랜스다. 김태원 나름의 프로그레시브는 2집을 통해 그 방향을 얻었다. 3집으로 부활하기까지 짧았던 20대 초반의 전성기였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거친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괜히 말이 길다. 그리 길 만한 노래는 아니다. 그냥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먼 기억 너머의 추억을 떠올리려는 것이다. 그 시절의 순수와 행복과 기대를. 그러지 못한 지금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담아. 지금 듣는 느낌은 그래서 또 사뭇 다르다. 그 시절이 더 가까웠다. 그 기억을 떠올린다.
김태원의 예능출연으로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퍼즐조각들을 마저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감탄했다.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감성 그대로를 짧은 노랫속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굳이 음악을 듣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시다. 음악은 미처 채우지 못한 감정들을 전한다. 차라리 경이다.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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