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쁜 녀석들 -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인간이 만드는 죄

까칠부 2014. 12. 1. 02:41

증오란 이유가 없다. 대상도 없다. 당연히 끝도 없다. 이정문(박해진 분)이 딸을 죽인 범인이고, 그래서 자신이 청부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고 해서 오구탁(김상중 분)의 울분이 풀릴까? 죽인 다음에는 왜 죽였는가 탓하고 원망할 것이다. 자기가 청부해서 이정문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책임을 지우려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한이다. 끝없이 이어지기에 한인 것이다.


어쩌면 범죄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어떤 매우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주장들을 옹호하기 위한 드라마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오구탁 자신이 범죄자였다. 자기 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부정한 돈을 받고 범죄를 눈감아주었다. 그런 주제에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와 증오를 드러낸다. 폭력조직의 두목으로 그동안 이두광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또한 오구탁이 눈감아줌으로써 다시 피해를 입게 될 수많은 억울함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두광의 죄가 이정문보다 과연 작을까? 그런 이두광으로부터 돈을 받고 죄를 덮어준 오구탁의 죄는 과연 작을 것인가?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벌주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가족을 핑계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탓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딸을 좌절케 만든 현실에 굴복하고 마는 오구탁처럼.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척 정의롭다. 특히 자기보다 어린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가혹하기조차 하다. 질투일까? 아니면 자기혐오의 투영일까? 이정문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모습이 딸을 맞이하는 다정한 아빠의 모습과 대비된다. 전단지에 속아서 노래방도우미로 갔다가 폭행까지 당하고 입원한 딸의 모습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자신이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유흥업소에서 웃음을 팔고 있는 어린 미술학도에게 양심을 팔라 다그치고 있었다. 웃음을 팔지 않았기에 폭행한 그 남성과 양심을 팔지 않았기에 그녀의 약한 곳을 헤집으며 협박하는 오구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러고서도 여전히 딸을 위해서라 말할 것이다.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 변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근엄하게 훈계할 것이다. 너는 똑바로 살아라. 누가 그들을 타락케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그냥 자기만족이었다. 갈 곳 없는 울분을 그렇게라도 풀어야 했었다. 자기를 향한 혐오와 죄책감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었다. 정작 이정문을 죽여달라 청부하는 순간에도 그가 범인일 것이라는 확신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이정문이 범인이어야 했을 뿐이다. 범인이 되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죽어주면 되는 것이다. 이정문이 범인이다. 이정문이 잘못한 것이다. 마땅히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때로 어떤 사실보다 믿음이 더 진실하다. 타락한 것도, 죄를 지은 것도, 정작 이정문 자신이었다. 자신의 딸을 위한 제단에 또다른 젊은이를 제물로 올린다. 역설이지만 냉엄한 현실이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다. 정황만이 있다. 정황조차도 동거중인 여자친구에 의해 모두 부정당하고 있다. 하지만 범인이다. 심증이 그렇게 가리킨다. 거짓말탐지기조차 사이코패스라는 한 마디에 납득하고 넘어간다. 사이코패스니까 거짓말탐지기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증인이 없으면 만든다. 증거가 없으면 생존자를 만들어 증언케 하면 된다. 법적으로 이정문은 유죄다. 재판을 통해 화연동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확정되어 형까지 살게 되었다. 그러면 죄인이니까 이정문에게는 인권이란 없는 것인가. 인권이 없으니 이정문에게는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일 게다. 인간의 법이란, 제도란, 아니 인간 자신은 그처럼 완벽하고 무결한가. 인간이 만든 죄다. 인간이 만든 죄인이다.


아무래도 시즌2는 어려울 것 같다. 여기까지 왔으면 오구탁과 이정문이 계속 같은 팀을 이루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인다. 정태수(조동혁 분) 역시 그나마 가까운 지인들을 오구탁의 청부로 모두 잃고 말았다. 정태수가 오구탁을 죽여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정문이 오구탁에게 어떤 식으로 복수하든 그의 입장을 지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오구탁이 법과 정의를 말해봐야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자격을 잃었다. 스스로 법을 어기고 정의를 비웃었다. 오구탁 자신이 죄인이며 악인 것이다. 오구탁 자신도 역시 죄인이 되어 다른 죄인들과 더불어 범죄를 쫓는 드라마가 될까? 고작 현장에서 지휘하는 마지막 사건이 될 것이라며 경찰들을 다그치던 남구현(강신일 분) 청장 역시 오구탁에게 정태수와 박웅철(마동석 분), 이정문을 보내준 동기를 의심받게 될 것이다. '경찰청 특수수사팀'은 이제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아예 생각도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설정했다. 다시 어울릴 수 없도록.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수 없도록. 주제만이 남는다. 누가 죄인인가? 무엇이 죄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으로 인간은 인간을 단죄하는가? 그 어리석음에 대해서. 아마 일반 대중 역시 사건에 대해 들었더라면 오구탁과 다를 것 없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늦게라도 사실이 밝혀져도 바뀌는 것은 없다. 이미 죄인이 되었고 단지 죄가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죄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 그가 더 흉악한 죄인이라는 증거다. 처음 기대했던 죄인이 범죄를 쫓는 독특함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먼저 죄와 죄인에 대해 물으려 하는데.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죄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죄는 잊고 높고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죄만을 심판하려 한다. 타인의 죄를 심판하게 자기는 무결하다. 더 엄격하게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할수록 자신은 정의로울 수 있다. 딸을 죽인 범인을 단죄하여 죽였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 모순과 부조리가. 인간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찾고 죄인을 단죄하려는 이유다. 드라마의 이유일 것이다.


과연 이정문은 화연동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가? 여기서부터 설정의 오류는 시작된다. 천재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단순히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싸움은 잘한다. 아니 싸움이라도 잘해야 했을 것이다. 진실을 쫓는다. 만일 이정문이 실제 범인이었다면 오구탁은 옳았는가. 또 하나 숙제다. 많이도 멀리 왔다. 새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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