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3.1 만세운동의 의의...

까칠부 2015. 3. 1. 06:46

흔히 3.1운동이라 하면 3.1운동 하나로서만 생각하다. 태화관에 모여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만세삼창을 부르고,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태극기를 손에 든 민중의 행렬이...


그러나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이 세 가지 사건은 하나가 아닌 별개의 독립된 사건이었다. 물론 그 시작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였지만, 그 주체도 달랐고 그 성격도 달리하는. 아니 3.1운동 자체가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혁명"이기도 했었다. 비록 미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일단 민족대표 33인이 파고다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부터도 그렇다. 재판과정에서 자신들 입으로 스스로 밝힌 바이지만, 그들은 결코 학생 노동자 등의 민중과 결합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천박한 학생, 노동자로 인한 시위가 자칫 폭력사태로 이어질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면 일본은 물론 그들이 독립을 호소하고자 하는 세계열강의 동정과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족대표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기득권이었다. 종교지도자이고, 그러면서 지주이고, 자본가이고, 지식인이었던 그들은 이미 멸망해버린 대한제국의 잔재이기도 했다. 근대적인 민족의식에 가까이 접근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세계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뉘어진 봉건시대의 그것이었다. 감히 천박한 학생 노동자따위가 폭동을 일으키다니. 그것은 대한의 독립 이전에 그들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학생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파고다공원으로 가지 않은 것이었다. 파고다공원에 모인 군중에게로 다가가기보다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끝낸 것이었다. 파고다공원에 모인 군중의 봉기를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바로 경찰에 전화해 자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의 3.1운동의 전개에서 그들이 한 역할이란 독립선언서 하나 말고는 없다 할 수 있었다. 그 시간 그들은 모두 유치장에 갇혀 있었으니.


정작 봉기를 이끈 것은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교사 등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경술강제병탄 이후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비밀결사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러한 비밀결사를 구성하고 있던 학생, 교사, 목사, 의사, 변호사, 상인 등의 이를테면 쁘띠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유학파까지 포함되어 있던 그들은 민족대표들보다 더 국제정세에 해박했고, 자유와 평등 등의 근대적인 사상에 대해서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따라서 민족대표들보다 더욱 엄밀했으며, 그들의 행동은 더욱 강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젊기까지 했다.


민족대표가 없는 자리는 바로 그들 학생과 지식인들이 대신했다. 대신해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삼창을 하고, 그리고 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학생과 지식인들의 행동은 곧 그들의 비밀결사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어 상인과 노동자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했으며, 거리로 나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 농민이었다. 아무래도 시대의 변화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농민이었지만, 그러나 경술강제병탄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농민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단행된 토지조사사업과 지주전호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농민들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으며 지위는 더욱 열악해졌다. 하다못해 소작을 부쳐먹으려 해도 이전까지 보장되던 경작권마저 부정되어 불안감이 높아진 채였다. 단지 복종에 길들여져 억눌려 있을 뿐 가장 그러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농민일 터였다.


태화관에서, 다시 파고다공원에서, 전국 각지의 대도시와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3.1 만세운동은 마침내 한적한 농촌에까지 그 불길을 이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타오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거의 동시다발적 전국의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들 농민들의 만세시위는 그래서 무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고, 조선총독부의 폭력진압에 대해서도 자체적으로 쇠스랑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무력저항을 시도하는 등 가장 격렬했었다. 심지어 헌병주재소나 면사무소, 금융기관까지 이들의 습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시작은 비폭력이었지만 당시 농민들이 처해 있던 상황은 그들을 폭력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보았듯 3.1운동은 전혀 다른 세 집단에 의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아무래도 봉건적인 지배계급의 잔재로써 민중과 유리된 채 오로지 새로운 지배세력인 일본제국주의와 소통하려 하고 있었고, 반면 3.1운동을 확산시킨 주체인 학생과 지식인들은 보다 근대적인 민족적 자각을 가지고 근대적인 이념을 주체적으로 대한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실현하려 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보다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대한의 독립에서 찾았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였다. 결국 민족대표 33인이 일제에 항거하게 된 이유, 학생과 지식인은 물론 소상공인들이 그에 호응한 이유, 나아가 사실상 대한제국에 무슨 미련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노동자와 농민들마저 시위에 참가해야 했었던 이유,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의 그들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주이며 자본가이고, 종교지도자였던 민족대표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회사령 등의 일련의 조치들은 막 형성되어가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부르주아들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농민이야 이미 말한 대로였다.


즉 그들은 서로 따로따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봉건적인 지배계급이든, 아니면 근대적인 부르주아 계급이든, 혹은 노동자와 농민이든,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 앞에 이익과 권리를 침해당하는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공동운명체까지는 과장이겠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그들은 남이 아니었던 것이다. 민족의식에 있어 필수적인 상상의 공동체라는 전제가 이로써 형체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물론 3.1운동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대표 33은얻은 것도 없이 고문당하고 재판받고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고, 정작그들을 이끌었어야 할 민족대표들이 부재한 사이 학생과 지식인,소상공인의 투쟁은 산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노동자 농민의 투쟁 또한 가혹한탄압 아래수그러들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은민족대표 33인의 전근대적인 안이한 현실인식과 아직 계급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조직화되지 못한 한계 때문이었다. 혁명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더 3.1운동은 그렇게 얻는 것 없이 일본제국주의의 폭력 아래 잦아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연 3.1운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가. 그러나 3.1운동 자체가 최초의 근대적인 혁명적 시도라는 점에서 이미 그 가치는 증명되었다 할 수 있다. 막 형성되기 시작한 부르주아와 전통적인 농민을 중심으로 한 프롤레티리아의 계급적 자각이 일어났고, 일본제국주의라고 하는 침략자에 대한 단일한 투쟁전선은 민족이라고 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일깨웠다. 이제까지의 조선인이란 모호한 전근대적인 공동체적 의식이라면 이로써 조선인이란 정치적 주체적 집단으로서의 민족으로 일깨워진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이 놓인 계급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민중의 투쟁적 역량에 대한 확인은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의 민중이 조직화 주체화되어 독립운동과는 별개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와 투쟁하는 근간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3.1운동은 전근대적인 대한제국이라는 봉건왕조와 조선인을 단절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었다. 이전까지 의병운동 가운데는 다시 대한제국의 왕실을 회복하는 복벽운동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면, 어느새 근대적인 사상의 수입과 더불어 확산된 공화주의는 조선에서 조선왕실을 배제하고 말았다. 3.1운동이란 바로 그러한 대한제국 왕실을 배제한 대한의 민중의 주체적인 자각을 전제로 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전근대와의 단절과 근대로의 시작을 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이 한민족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래서다.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민족이 바로 이로써 성립되었다. 경제적 주체로써의 계급적 의식이 이로부터 구체화되었다. 이제까지의 방향을 모르고 단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전개되던 반일본제국주의 전선 역시 보다 체계화 구체화되며 분화되기 시작했다. 비록항일전선의분열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 한 걸음 큰 전진이었다.


즉 3.1운동의 가치란 단순히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했다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민족적 자각이었으며 계급적 자각이었다. 전근대적인 안개에 갇혀 있던 조선의 민중들이 비로소 근대적인 세계를 맞이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역동성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3.1운동을 단순히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독립운동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래서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말이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인 자각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는데 단지 독립운동만으로 - 독립선언서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는 바로 그렇게 열린 근대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3.1운동을 다시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우리민족의 중대한 사건으로서.





내가 술만 안취했어도 다시 수정해서 손 볼 텐데... 취해서 맨정신이 아니라 못하겠다. 이게 그러니까... 후후후... 아무튼 재탕. 아는 사람 있어도 모른 척.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