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징빌록 - 이산해와 류성룡의 대립, 북인과 남인이 갈라서다

까칠부 2015. 3. 15. 04:43

원래 조선에서 토지로부터 적은 세금만을 거두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생산자인 농민에 대한 배려였다. 정작 자기가 농사짓고도 세금을 내느라 자기 먹을 곡식마저 없어 굶주려야 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으니 차라리 나라에서 덜 쓰고 농민들로부터 덜 걷자.


그래서 관리들의 녹봉도 비현실적으로 적었다. 아전들은 아예 녹봉이 없었다. 관리들의 도덕성에만 의존한다. 삼간초가에 살면서 잡곡밥에 나물로만 끼니를 때우면서도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난 모든 수고와 노력을 기울인다. 가족조차 돌보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이상적인 관리가 몇이나 있을까?


정철(선동혁 분)의 허물이라고 해봐야 사실 다른 관리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는 정도다. 아주 지나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는 부정을 서로 눈감아준다. 다만 명분이 필요할 때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상대의 부정은 적당한 빌미가 되어준다. 왕이 정철을 쳐내려 하는데 필요하다면 작은 허물까지 들추어 그를 위한 이유를 뒷받침해준다. 부정의 카르텔이랄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정승이라도 가족의 생계가 걱정된다.


류성룡(김상중 분)이 건의하기 벌써 100년도 전에 세종에 의해 시행되었던 전분육등과 연분구등의 공법이 어째서 당시 유명무실해져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너무 품이 많이 들었다. 일일이 토지의 비옥도를 측정하고,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에 맞춰 적절한 세금을 책정한다. 그러면서 그에 불만을 갖는 지주와 양반들까지 다독여야 한다. 세조의 정통성없는 즉위 이후 급격히 모든 전세가 최하세율로 일괄적으로 맞춰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그럴만한 돈도, 인력도, 조직도 아직 조선에는 없었다.


어차피 전세란 양반이나 지주들에게서만 거두는 세금이 아니었다. 자기 땅이 있으면 자영농도 당연히 오른 만큼 전세를 내야 했다. 그동안 양반과 지주들이 세금을 아끼기 위해 주로 써왔던 방법이 소작농에게 세금부담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세금이 오르는 만큼 역시 소작농들도 양반과 지주들의 선택에 의해 그만큼의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결국은 돈이다. 전국의 토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항상 합리적으로 세금을 매기려면 그를 위한 전문적인 관청과 관리들이 필요하다. 양반과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세금을 떠넘기는 등의 편법과 탈법을 일삼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서도 전국적인 조직과 그에 상당하는 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그만한 관청과 관리, 조직과 인력은 어떻게 준비하고 또 유지하는가? 그저 왕이 하라고 한다고 아무런 계획없이 시행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지출을 늘려야 한다. 그만한 구조와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다시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 역설이 생기게 된다. 그럴만한 타당성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모순되고 불합리하더라도 덜 걷음으로써 더 적은 부담만을 지우게 한다. 더 합리적이고 더 체계적으로, 그러나 그를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더라도 더 많은 혜택을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더 적은 것만을 해주더라도 더 적은 세금만을 거둘 것인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증세인가. 감세인가. 양반과 지주만이 아니다. 말했듯 양반이든 지주든 신분에 대해 매기는 세금이 아니다.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다. 작은 땅만을 소유한 자영농이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지만 그에 대한 반발은 별개의 문제다. 이미 오랫동안 관행처럼 여겨져 온 것이었다.


조선의 가장 큰 한계이며 모순이었다. 관리의 부정을 증오한 주원장의 의지를 '명률'과 함께 그대로 수입했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관리든 아전이든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부족한 세수를 메꾸기 위해 아예 군역을 살겠다는 사람들마저 못하게 막고는 군포로 대신 내도록 강요한다. 근본부터 바꾸어야 한다.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어째서 세종에 의해 시행된 전분육등과 연분구등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전세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는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의 문제다.


어쨌거나 이산해(이재용 분)와 류성룡의 서인과 정철에 대한 감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축옥사로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담과 남명계열의 문인들이었다. 화담의 제자인 이지함의 조카이며, 남명의 문하로써 정인홍과도 절친이었다. 서인과 정철에 의해 목숨을 잃은 많은 이들이 이산해의 동문이고 또한 지인들이었다. 그에 반해 류성룡이 속한 퇴계학파는 거의 희생이 없었다. 류성룡만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합리를 생각할 줄 알아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산해만 정략적이고 감정적으로만 행동하려는 이상한 인물로 그린다. 물론 실제 행동에 있어 더 합리적이었던 것은 류성룡이 맞다. 일부만 보여준다.


왕이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일 수 없다. 왕이 곧 천하이기 때문이다. 왕이 곧 조선이다. 그래서 왕에게는 사생활도 없다. 왕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상이 건저를 논의하고 건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조(김태우 분) 역시 건저 자체로만은 정철을 벌하지 못한다. 세자의 자리 또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왕을 통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친다. 모든 왕이 이상적인 왕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날 수는 없을 테니 교육을 통해서 왕에 걸맞는 자질을 갖추도록 이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신파로 흐르고 있다. 조선 사대부의 이상을 부정한다. 왕이 인간이기를 연민한다. 하기는 정철이라면 충분히 그리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송익필(박지일 분)과 모의한 내용들은 어떻게 되는가. 말바꾸기였을까? 결국 정철도, 류성룡도, 윤두수(임동진 분)도 선조와의 개인적인 의리와 인정에 이끌려 관계를 이어간다. 그나마 재상으로서 가장 임금과 거리를 두고 행동하는 것은 이산해 한 사람 뿐이다.


큰 흐름은 결국 역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마저 부정하면 더 이상 역사드라마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드라마로서의 재미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취사선택과 윤색이 필요하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한 재미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드라마에서 보던 동시대의 일본의 모습과 한국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그것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김규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토요토미 히데요시보다도 토요토미 히데요시같다. 익살과 잔혹함이 진짜 광기처럼 뒤섞인다. 조선을 침략하겠다 선언하는 모습까지도.


아무튼 흥미로울 것이다. 광해군(노영학 분)은 선조를 닮았다. 선조처럼 많은 옥사를 일으켰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토목공사 역시 끊이지 않았다. 광해군이 실정한 이유다. 선조처럼 광해군도 잔인했다. 너무 여리고 순수해서였을까? 어떻게 묘사할까 기대하게 된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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