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 냉혹한 현실,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까칠부 2015. 3. 17. 07:34

결국 여기에서 두 사람이 속한 어쩔 수 없이 다른 세계가 드러나고 만다. 한인상(이준 분)은 안다. 그러나 서봄(고아성 분)은 모른다. 서봄은 너무나 급하고 간절한데, 그러나 한인상에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은 어째서 부자이고, 가난한가?


그 부분에 대해 드라마는 서봄의 부모와 최연희(유호정 분)의 친구 지영라(백지연 분)를 대비시켜 설명하려는 듯하다. 자존심을 위해 한정호(유준상 분)의 제안에 오히려 분노하던 서봄의 부모 서형식(장현성 분)과 김진애(윤복인 분)에 비해, 오히려 대기업 회장의 아내이고 지하금융 큰 손의 딸인 지영라는 당장의 손해를 피하기 위해 기꺼이 최연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여기서 한정호와 최연희, 그리고 지영라의 서로 얽힌 과거사가 드러난다. 단지 사채업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영라는 한정호의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영라가 거절당한 그 자리에 친구인 최연희가 당당하게 들어가 앉고 있었다. 그동안 지영라가 적대적일 정도로 최연희를 의식해 온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지영라에게 잊을 수 없는 굴욕이었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단 최연희에게 무릎을 꿇기로 결심하자 그 굴욕과 상처까지 아무렇지 않게 끄집어내어 스스로를 낮추려 한다. 자존심보다, 굴욕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한정호와 최연희가 서봄의 부모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분노마저 하게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나름의 선의였다. 최선의 성의였다. 한정호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당연했다. 선의와 성의는, 즉 진심이란 상대에게 돌아갈 이익으로써 계량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베풀고, 또 양보하느냐에 따라 상대에 대한 진심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서, 당사자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당했다. 어떤 원시적인 소수부족들에게는 자신의 선의를 거절당하면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풍습이 있었다고도 한다.


B는 A에게 수익배분을 전제로 창업자금을 빌려주었다. C는 B에게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B와 A 사이의 금전거래에서 C는 B에게 지급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B의 A에 대한 채권압류소송을 시작했다. 과연 C는 B와의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 조금 기분이 나빴던 것은 몇 달이나 직원들 임금을 체불하고, 심지어 회사까지 폐업하고서도, 바로 얼마 안있어 호화결혼식에 신혼여행까지 거창하게 다녀온 어떤 사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도 노동부를 통해 진정하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까지 진행했음에도, 정작 그 일부만을 합의를 통해 변제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답을 알고 있었다. C는 절대 B를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라 하는 것일 게다. 어차피 서로 빌릴 만하니 빌렸고, 빌려줄 만하니 빌려준 것일 게다. 아직 서로에 대한 채권과 채무가 문제없이 유지되는 이상 서로 적대하거나 대립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상황이 바뀌어 채권자가 채무자가 될 수도 있고, 채무자가 채권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은 서로 대등하다. 그에 비해 C가 B에 대해 요구하는 체불임금이란 같이 사업을 하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A의 입장에 있어 바로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이 B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A역시 B와 같은 입장에 있을 것이다. 언제고 자신에게도 닥칠 지 모른다는 만일의 가능성이 서로의 이해를 일치시킨다. 결코 노동자가 원하는대로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서는 안된다. C는 B만이 아닌 A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면 노동부도, 변호사도 그의 편이 될 수 없다.


냉정한 현실이다. 힘이 곧 정의고 윤리다.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런 세상이 다시 그런 사람들을 그런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것에 저항하거나 거부한다면 결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한정호가 만나는 대단한 신분과 위치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전직 국무총리이고, 언론사의 편집장이며, 대기업의 회장이다. 그것에 저항하거나 거부한다면 서봄의 부모처럼 평생 가난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한정호의 집 고용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아무리 오랜 인연이 있어도 이익 앞에서 타협은 없다. 그 집요함과 철저함이 그들의 지금을 만들지 않았을까?


비로소 현실의 가난을 자각한다. 가난이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다면 그만큼 참고 아끼면 그만이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꼭 필요한 것이 있어도 버티며, 없으면 없는대로 그에 맞춰가며 살아간다. 그조차도 안되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어찌되었거나 살고자 한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서봄의 가족 역시 현실에서 보면 그렇게 가난한 편이 아니다. 한정호의 가족이 아니었다면. 한정호의 가족이 자신의 가족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신분제도가 사라진 평등사회에서 '신분상승'이라는 모순적인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가난이란 굴욕이다. 가난이란 모멸이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막대한 현금을 움직일 수 있는 사채업자조차 명예가 없기에 한정호의 집으로부터 가차없이 거절당하고 있었다. 부에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와 다시 그에 걸맞는 명예, 어느것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는 가난한 것이 된다. 하필 한정호의 직업이 변호사인 이유일 것이다. 법을 다룬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존경받아야 하는 중요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직 국무총리와 대기업 회장마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렇다면 서봄은 그것들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하여튼 그래서 3대째라는 것일 게다. 1대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일구어야 했고, 2대는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에 비해 3대는 이미 이루어진 것들만을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이 지금의 가난과 같은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필사적인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보다 혐오와 멸시가 더 강하게 드러나는 이유일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제 태어나면서부터 부와 가난이 결정된 세상을 사는 세대들이 나타났다. 부도 가난도 대수롭지 않다. 서봄과 충돌한다. 서봄에게는 아직 부가, 힘이 너무나도 간절하고 절실하다.


대수롭지 않은 웃음 뒤에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를 감춘다. 한 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전보다 더 빠진 머리카락에 분노하는 한정호나, 애써 아닌 척 변명하면서도 점과 부적에 기대려 하는 최연희의 모습이나, 지연라를 의식한 최연희의 질투에 한정호는 거실 소파에서 잠들어야 한다. 대기업 회장의 사모님으로 어쩌면 최연희보다 더 높은 신분에 있는 줄 알았던 지연라의 현실은 섬뜩할 정도로 냉혹한 그들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한정호가 요구한대로 서봄과 한인상 부부에게 냉혹한 현실을 가르쳐주는 자리에서도 서봄의 젖몸살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변호사의 윤리에 대해 사법고시 과외선생 경태(허정도 분)에게 묻던 자리는 한인상과 각침대를 쓰는 어린 부부의 이야기로 바뀌고 만다. 어차피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메시지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즐긴다.


어째서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는가? 어째서 그들은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 어째서 자신들은 그러지 못했는가? 먹는 것 하나에도 철저히 격식을 갖추며, 엄격한 훈련과 노력이 뒤따른다. 그저 가진 자들을 비웃으려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들로부터 하나하나 배워간다.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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