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싶어 한다. 자신이 사는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믿어온 세계의 질서란 언제나 그대로임을. 어제가 그제같고, 오늘도 어제같고, 아마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아무일없이 그렇게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래서 말한다.
"다른 건 문제 없어! 네가 문제야!"
굳이 세월호를 단순한 교통사고라 규정짓고 싶어하는 이유인 것이다. 어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사고당한 피해자들이 운이 없어 그런 일을 당한 것이다. 그래야 자기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안전할 테니까. 무언가 밝히고 바꾸는 자체가 불안한 것이다.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가. 굳이 그런 것까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가. 모르면 모르는대로 좋은 것이다. 진실을 파헤쳐도 오히려 당사자를 비난한다. 누가 더 잘못했는가가 아닌 누가 시끄럽게 사실을 알렸는가를 문제삼는다. 얼마나 자신에 문제가 있는가. 개인에 문제가 있는가.
부정을 저질러도 어차피 누구나 하는 것이니. 비리가 드러나도 누구나 다 그런 정도는 하는 것이니. 그렇게 납득하고 만다. 여전히 세사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지간한 추문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럽더라도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는 세계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이 더 보수적인가. 불안하니까. 두려우니까. 당장 최저임금 올린다고 하면 그 이하의 임금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나마라도. 그조차도. 최소한 자신이 가난한 것이 세상의 탓은 아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야 희망도 있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한 사람만 지우면 된다. 눈 감고, 귀 막고, 아예 생각지 않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면 된다. 누군가 진실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한다면, 억지로 생각케 한다면 차라리 그를 증오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절망보다 더한 낙관이다. 알 수 없는 희망모다 익숙한 절망을 쫓는다.
니가 문제다! 보아서 문제고 들어서 문제다! 생각해서도 문제다! 어째서 독재자들은 대중을 절망케 하는가. 절망에 중독된 이들을 미련으로 유인한다. 더 절망하도록. 더 좌절하도록.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지지 못하도록. 미련과 희망은 다르다. 차라리 파멸조차 달콤하다. 무거운 이유다.
일베를 생각한다. 어떤 보수를 생각한다. 하기는 그들에 반대하는 어떤 이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보이기도 한다. 멀게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독재, 그리고 무엇보다 IMF, 한국인의 영혼에 틀어박힌 가시와 같을 것이다. 곪고 덧나서 마침내 온몸을 썩게 만든다. 괴물이 되어 간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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