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은 전문직 종사자만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일상어로서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선택한다. 지우고 남긴다. 바위를 쪼아 어디를 덜어내고 어디를 남기면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것을 조각이라 말한다. 결국 지우고 싶은 것을 지우고 남기고 싶은 것을 남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관된 방향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곧 정체이며 존재가 된다.
의지라는 것이 개입되는 때문이다. 인지하고, 사고하며, 판단한다. 구분하고 정의한다.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쫓는다. 단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다. 한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며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그런 자연스러운 행위에마저 의미를 부여하고, 구분짓고, 판단하려 한다. 좋아해도 좋은가.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래서 편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해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은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다. 난감하다. 곤란하다.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다. 라준모(차태현 분)와 탁예진(공효진 분)의 너무나 오랜 뜨뜻미지근한 관계는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성으로서 좋아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들은 너무나 좋은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 자칫 자신의 감정이 전해짐으로써, 혹은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지금까지의 관계마저 잃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이미 있는 사실마저 판단하여 선택하려 한다. 애써 모르는 척, 기억나지 않는 척, 사실이 아닌 척.
당장 게임을 위해 가까운 사람에게 연락을 하려 해도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연락도 되지 않고, 겨우 연락이 되었더라도 도움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런 기억따위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여긴다. 자신은 주위에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다. 절대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하거나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어 버린다. 그때도 신디(아이유 분)는 편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중의적이다. 지금까지의 촬영분을 편집해달라는 요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그 기억을 편집해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를 함께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로 자신이 믿는 바가 실제가 되고 사실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리얼버라이어티일 것이다. 리얼버라이어티의 리얼리티란 단지 기믹에 불과하다. 이미 PD에 의해 편집된 - PD의 판단에 의해 선택된 결과물인 것이다. 사실인 것처럼. 실제인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도록.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시청자가 프로그램에 기대하는 재미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재미없으면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재미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 쓴다. 그것이 곧 프로그램의 정체성이다. 예능은 웃겨야 한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은 정보전달이 그 목적이다. 같은 예능프로그램이라도 콩트코미디인 '개그콘서트'와 토크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와 리얼버라이어티인 '1박 2일'이 모두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고, 누군가는 전하지도 못하고 그저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누군가는 그조차 포기한 채 혼자만의 감정에 도취된다. 오랜 친구이기 때문에. 하늘같은 선배이기 때문에. 자신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대스타이기 때문에. 이유도 많고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가끔 잃어버린 원본이 발견될 때도 있다. 사고처럼 깊숙이 묻어두었던 원본의 기억들이 술김에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사고 역시 편집의 대사이다. 탁예진에게도, 라준모에게도 그것은 단지 사고에 불과하다.
그래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얽히고 부딪힌다. 뻔히 존재하는 사실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판단한다. 멋대로 착각하고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처음에는 오해였지만 이제는 사실이 되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또다른 사실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더욱 드라마 말미의 PD들과의 인터뷰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각기 편집의 목적도 이유도 다르다. 방법도 다르다. 그러나 추구하는 바는 한 가지다. 자신의 직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이 곧 정체이며 존재일 것이다. 인간이 곧 드라마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이 자신을 정의한다. 선택이란 존재다.
하기는 이미 지난 회차에서 탁예진에게 길들여지는 것 같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소속도 다른데 아무리 차수리비를 받기 위해서라지만 탁예진과의 접촉도 잦았다. 술에 취해서 호떡을 들고 탁예진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로 신디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호떡이었다. 술김에 진심을 말한다. 라준모를 좋아하는 탁예진이 라준모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것이 싫다. 고백도 백승찬답게 어눌하면서 귀엽게 한다. 같은 남자인데도 귀엽다는 느낌을 받고 만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던 것일까.
일개 말단 신입PD를 좋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는 신디의 짝사랑이 답답하면서 애처롭다. 아이유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졌다. 건방지고 오만하던 신디에게 인간다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신디의 불면증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원인이 되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 불안하고 오늘이 초조하다. 의지할 곳 없이 자신에 대한 확신마저 가지지 못한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난다. 백승찬이 친 밑줄 위에 다시 밑줄을 더하는 것은 그에 대한 확인일 것이다. 소설속 데미안처럼 자신도 그럴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비로소 깊이 잠들 수 있다.
편집실의 일상이 마치 데자뷰처럼 자꾸 헛웃음을 짓도록 만든다. 예민해지고 까칠해진다. 외부와 단절되고, 모든 욕구마저 차단당한 채, 오로지 단순작업만을 반복해야 한다.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 그것이 식욕이고, 만만한 막내 백승찬에 대한 트집잡기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고 섬세한 작업이 자신을 미쳐가게 만든다. 비단 PD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편집해야 할 원본은 카메라만도 몇 대나 된다. 그것을 최대한 재미있게 방송시간에 맞춰 편집해야 한다.
그래도 바로 그 시간이 PD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일 것이다. 어떻게 편집하는가에 따라 같은 출연자라도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 자칫 연예인으로서 당장의 오늘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그토록 오만하고 제멋대로이던 신디의 소속사 사장 변미숙(나영희 분)이 라준모에게 먼저 다가와 자세를 낮춘다. 방송국의 일상이란 익숙하면서도 항상 신선하다. 리얼리티가 의미있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큰 사건 없이도 소소한 재미들이 익숙한 일상과 함께 흥미롭게 스며든다.
익숙한 일상과 함께 친근하면서 강한 개성을 드러내는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더해준다. 김종국(김홍순 역)이 이렇게 연기를 잘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다. 김홍순의 속물과 고양미(예지원 분)의 사차원은 드라마에 강한 풍미를 더하는 향신료와 같을 것이다. 김태호(박혁권 분)의 어수룩한 속물의 모습이 애잔한 느낌마저 준다. 드라마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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