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마침내 만난 세 마리 용, 치이고, 싸우고, 타고 오르다!

까칠부 2015. 11. 4. 04:40

난세와 싸우는 자, 그리고 난세를 타려는 자, 차이는 한 가지다. 누구를 위해 분노하는가?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특정한 누군가인가? 아니면 특정하지 않은 모두인가? 그래서 땅새(변요한 분)와 정도전(김명민 분)의 입장도 갈린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의보다 그로 인해 희생되어야 할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동기를 통해 그 차이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지키고자 했지만 지키지 못했던 아이들을 위한 분노이고 죄책감이었다. 고작 이미 손에 쥔 권력을 놓치기 싫은 욕심 때문에 나라를 구한 영웅이 죽고, 살아야 할 아이들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든 바꾸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선택해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고려에 대한 사대부로서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백성들을 위한 사대부로서의 대의를 쫓을 것인가. 어느것도 사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키며 운명을 함께 했던 정몽주(김의성 분)는 부귀와 영화가 그곳에 있어 그 길을 선택했겠는가.


반면 이방원(유아인 분)의 경우 상처받은 자신의 자존심이 가장 큰 동기가 되고 있었다. 이바원이 처음으로 정의를 말하기 시작했던 것도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와 굴욕을 안겨준 당사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해하여 앙갚음하고 난 뒤였었다. 동굴에서 마침내 정도전과 만났을 때도 마치 알아달라는 듯 그동안 자신이 해 온 노력들과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시련들만을 쏟아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도전에게 거부당하고 쫓기듯 동굴을 나온 뒤에도 끊임없는 자기변명 끝에 정도전이 했던 '난세와 싸우는 자'라는 말에 도취되어 자신을 정의하고 있었다. 대본도, 연출도, 그리고 배우의 연기도 한결같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며 이방원이라는 인간을 정의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분노이고 싸움이기에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비극을 예고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를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결말까지 모두에게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각색해서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은 이방원에세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정도전이 만든 '밀본'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가 왕위에 오른 이방원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고 지하로 숨어든 이후가 그려져 있기도 했었다. 백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낳아준 아버지마저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기꺼이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속이고 농락한다.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이방원의 이기는 자신 이외의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홍인방(전노민 분)과 닮았다. 지식인다운 에고이며 신분에서 비롯된 아집이다. 필연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서 그를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땅새의 세계는 협소하다. 그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백성인 때문이다. 굳이 넓게 깊이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렵게 세상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말했던 그런 백성이었을 것이다. 당장 자기에게 닥친 불의에 분노하고, 자신이 겪어야 하는 부조리에 반발하면서도, 어느새 적응해 견디며 살아가는 약하지만 강인한 존재. 과연 그때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연희(정유미 분)가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어야 하지 않았다면 땅새는 손에 칼을 들고 피를 묻힐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연희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잊고 적응하며 아무일없이 고향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대의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고향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칼잡이다. 혁명가도 정치가도 될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칼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지키고 죽일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정의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큰 꿈이 시작된 바로 그 동굴에서 난세에 치이고, 난세와 싸우고, 난세를 타려는 세 마리 서로 다른 용이 모여 첨예하게 부딪힌다. 힘없는 백성들마저 수단으로 삼으려는 너희들의 의도와 계획을 도저히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도, 신의와 도덕마저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기꺼이 그 희생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난세를 끝내기 위해서는 난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의 의지와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난세가 끝나야 비로소 현실의 난세도 끝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땅새가 등돌려 나오고, 다음으로 정도전에게 이방원이 내쫓긴다. 연희가 정도전에게 땅새를 이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차라리 등돌려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땅새가 난세와 전혀 상관없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아무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면 된다. 더이상 과거와 얽히지 말고, 과거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그저 눈앞에 놓인 지금만을 열심히 살아가면 그만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난세를 끝내려 하기에 그녀는 이미 마음에 난세를 품고 있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기꺼아 자신의 마음에 지옥을 담는다. 땅새로 인해 정도전이 고민하고 있다 여기는 순간 연희는 주저없이 자신이 땅새를 이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정도전만이 이 지옥같은 난세를 끝낼 수 있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절망과 고통을 비로소 끝낼 수 있다. 그를 위해서라면 땅새와의 오랜 인연마저 아무렇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과연 그에 비해 이방원은 얼마나 자신의 마음에 지옥을 담고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성계(천호진 분)가 스스로 일어서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이 지옥임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겪어야 할 절망과 고통 역시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마음속에 벼린 칼이 아직 충분히 날카롭지 못하다. 어설픈 결심으로 섣부르게 뛰어들어서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주위의 우려와 반대에도 안변책의 철회를 밀어붙이는 단호한 모습에서 정도전도, 이방원도 미처 읽어내지 못한 역전의 노장다운 굳은 심지를 엿보게 된다. 일어선다면 자신의 의지다. 만일 행동에 나선다면 자신의 결심에 의해서다. 한 가지 정도전이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이성계 자신의 결심과 의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그저 크기만 한 나무가 아니다.


이인겸(최종원 분)이 화사단의 대방 초영(윤손하 분)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땅새의 뒤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방원의 존재를 찾아낸다.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가장 크게 이익을 본 것이 누구인가. 홍인방이 결심을 바꿀 때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 것인가. 논리적이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이인겸의 추론이 이방원을 정면으로 겨누게 된다. 우연이란 누구도 예상하거나 유추해낼 수 없는 사고의 밖에 존재하는 사고와 같기 때문이다. 우연이 다시 필연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잠들어 있을 뿐 사나운 맹수의 이빨이며 발톱은 여전히 건재하다. 맹수가 더욱 사나워지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당할 때다. 길들여지기에는 너무 사납고 강한 맹수다.


굳이 이성계가 고려에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벌써 오랫동안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이었다. 약탈해오는 여진족과 맞서 싸우며 군과 민은 단합되고 단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무뿌리가 바위를 꿰뚫어 조각내는 것은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럴 힘이 있고, 그것을 제어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주위에 사람이 모이고 세력이 만들어지면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이인임이 이성계의 찬탈을 예견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성계에게 반드시 역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필연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성계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인겸의 통찰과 이성계의 인내가 천리를 마주보고 부딪힌다.


세 마리 용이 모였다. 봄이(신세경 분)는 아직 이방원에 이끌리는 자신의 낯선 감정에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다. 벌써 이방원과 함께 다닌지도 얼마인데 얼굴은 여전히 때투성이다. 무휼(윤균상 분)은 출신 때문인지 여전히 주변을 맴돌며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저 배부르고 등따습고 마음편하면 그만이다. 이성계는 아직 결심의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 이방원을 질타한다. 이방원이 처음부터 모두 망친 것이다. 시대는 아직 수면아래 잠들어 있다. 서로 엇갈리며 자신의 운명을 찾아간다. 역사는 이미 그 길의 끝을 훤히 보여주고 있다.


어설픔이 있다. 더 크고 넓은 배경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시간과 공간이 짜여진다. 연속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사용해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치밀한 대본과 배우들의 능숙한 연기가 보이지 않는 나머지마저 대신한다. 재미있어지고 있다. 상상은 이렇게 발휘하는 것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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