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팔다가 적발되었다.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데 고작 98만원에 그 모든 책임이 지워진다. 그나마 벌금은 50만원, 48만원은 담당공무원 접대하는데 들어간 비용이다. 그리고 당당히 말한다.
"이것이 한국의 방식이다!"
더 문제는 이것이 단지 드라마를 위한 픽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억단위의 이익을 부당하게 얻고도 벌금은 고작 수백만원 수준이다. 법을 어기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음에도, 그나마 처벌이라는 것을 받게 되더라도 불과 얼마 안 있어 사면되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어느새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원래 룰이라는 자체가 성가시고 번거로운 것이다. 당연히 본능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하다. 만만한 협력업체 직원에게 자기의 일을 대신 시킨다. 자기들만 편하고 좋은 날에 쉬려 프로모터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그런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본능이 시키는대로 자기들만의 이기를 추구한 달콤함과 편리함을 이미 알아버린 때문이다. 다시 원래의 원칙대로 되돌리는 것이 불편하고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여전히 푸르미의 직원들이 이수인(지현우 분)을 불편해하고 꺼려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새 노동자 자신마저 룰을 벗어난 일상에 익숙해 있다. 편해하고 있다.
아주 잠깐 양심에게서 눈돌리면 당장 수천만원의 이익이 더 생기게 된다. 어렵지도 않다. 그저 스티커 한 장 새로 인쇄해서 바꿔붙이면 되는 일이다. 눈 한 번 감아주고, 손 한 번 잡아주고, 서류에서 몇 글 자 고쳐주고, 고작 그 정도 수고로도 얼마든지 더 많은 쾌락과 이익이 자기의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차라리 양심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런 것들을 거부했을 때 과연 그들은 얼마의 수고와 비용을 추가로 더 지불해야 할까? 그것이 바로 양심과 원칙의 비용이다. 이수인의 방식을 따르느라 마트직원들이 감당해야 하는 불편과 수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싫다. 그래서 이수인을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굳이 추가로 더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이지 않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기존의 직원들이 자진퇴사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한다.
하나의 거대한 구조다. 노동자의 편에서 사용자와 싸우는 것과 사용자의 편에서 노동자와 싸우는 것 가운데 과연 어느쪽이 더 수월하고 어느쪽이 더 수고로울까. 그래서 심지어 노동자가 사용자의 편에 서서 같은 노동자와 싸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역량의 문제다. 비정규직만 버리면 정규직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비정규직까지 함께 살리려면 정규직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더 변명한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변명한 것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설득이 안되면 인정에 호소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노라. 모든 불법도, 편법도, 부도덕도 그렇게 인정과 사정으로 납득되고 넘어간다. 일상화된다.
한국의 다른 기업들은 다 그러고 있으니까. 자신들도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니까. 변명하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것이 바로 한국사람의 인정이다. 협력업체 직원에게 자기의 일을 대신케 하고, 프로모터들에게 불편한 주말근무를 강요하고, 그럼에도 그렇게 해 온 것이 자기들만의 관행이고 인정이었다. 단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 또한 이같은 구조를 만든 공범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고신(안내상 분)은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한 약자가 아닌 그저 시시한 약자를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같은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본연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 당위만이 이 싸움의 이유일 것이라고. 언젠가 노동자 자신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자신들 스스로가 포기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승리의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다.
"한국인은 노조를 가질 자격이 없다!"
아픈 일갈이었다. 차마 반박하려는 이수인의 말들이 비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적확한 지적이기도 했다. 불법과 편법이 일상화되었다. 반칙을 저지르고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오히려 당당하다. 문명이란 이성이다. 원칙이고 룰이다. 야만이란 본능이다. 욕망이고 이기다. 인정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본능을 긍정해 버린다. 오로지 욕망과 이기만이 존재한다. 서로의 욕망과 이기만을 추구할 것이라면 사측 역시 그에 충실할 것이다. 사측의 본능이란 당연히 자신들의 이익을 저해하는 노조의 부정일 것이다. 다만 그 순간 이수인만큼은 이성에 있어 지점장 갸스통(다니엘 분)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수인 자신이 가진 양심과 도덕성의 우위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수인이란 도태되어야 할 희귀동물일 뿐이다.
노동자는 선이 아니다. 노조 역시 선이 아니다. 단지 이 거대한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노동자의 이기와 노조의 이기, 그리고 사용자의 이기까지.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짓누르며 이용하려 할 뿐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노동자가 다시 노동자에게. 그런 절망속에서도 구고신은 낙천을 잃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선의를 믿어서가 아니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를 믿을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누구나 존엄해야 한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힘겨운 싸움이다. 아니 불가능한 싸움일 것이다. 그나마 지점장과 얼굴을 마주하고 솔직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때로 드라마의 판타지가 현실의 그것보다 더 비루하고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린 분노가 단정하게 벼려진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무겁고 두렵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697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룡이 나르샤 -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서, 이방원을 품어안다 (0) | 2015.11.11 |
---|---|
육룡이 나르샤 - 정도전의 선택, 이상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0) | 2015.11.10 |
송곳 - 구고신의 외침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0) | 2015.11.08 |
장사의 신 객주 - 장사하지 않는 객주, 먼 길을 돌아오다 (0) | 2015.11.06 |
장사의 신 객주 - 억지스런 전개, 천봉삼 천소례를 죽이다! (0) | 2015.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