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공부를 못한 것 뿐이다. 시험성적이 안좋은 것 뿐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을 이유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불러 망신을 주고 심지어 매질까지 한다. 어떤 아이들은 열심히 해도 안되고, 어떤 아이들은 열심히 한다는 자체가 어렵다. 차라리 반평균이 떨어져서 담임인 자신의 체면에 손상이 가서 그런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솔직하다.
정작 매를 맞아야 하는 공부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주고 배려라는 것을 한다면 그것은 매를 맞지 않아도 되는 공부잘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더 공부잘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기대따위 때리는 선생님이마 맞는 아이나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핑계였다. 단순한 합리화였다. 단지 책입회피였다. 그저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잘하면 된다. 그저 선생님은 학생들이 공부만 열심히 잘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돕는 사람이다. 그마저도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선생님에 대해 아이들은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일까.
어차피 선생님 자신도 모른다. 아니 아예 알려 하지 않는다. 어떤 학생이 좋은 학생이고, 좋은 학생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으로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 어른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역시도. 그래서 쉽게 공부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줄세우고 판단하고. 그리고 아이들은 체념을 배우게 된다. 매맞는 무리에 들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더 많은 다양한 개성과 가능성이 공존하며 발전해나갈 수 있는 사회란 너무 복잡하고 따라서 번거롭고 성가시기만 하다. 줄은 하나면 충분하고, 개인은 단지 그 줄을 따라 붙여진 번호 하나면 적당할 것이다. 그 하나의 줄과 번호만 관리할 줄 알면 모든 책임은 끝나는 것이다. 하기는 그런 것들이야 말로 근대를 규정하는 특징들이기도 할 것이다. 보편이라는 이름의 획일화와 효율이라는 이름의 억압과 강제, 하필 정반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개인과 자유가 발명된 것도 근대였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인간은 단지 전체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로서 교육을 통해 전체에 체화되게 된다.
"그거야 남들 열심히 할 때 열심히 안 한 자기탓이지!"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다 본인 책임이지!"
문소진(김가은 분)이 우기듯 내뱉은 이 말들이야 말로 바로 그런 증거들일 것이었다.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인정부터 받아야 한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노력이다. 경쟁이다. 승자만이 누릴 수 있다. 오로지 승자에게만 보상으로서 주어질 수 있다. 인간이든, 개인이든, 존엄이든.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승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자가 되어 낙오했기 때문이다. 낙오자에게는 마땅히 그에 따른 벌칙이 주어지게 된다. 더 열악하고, 더 혹독하고, 더 고통스러운. 당사자나 주위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남들보다 노력해서 승자가 되었다면 그만한 보상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단지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입장에 있다 여기면 옳을 것이다. 굳이 사용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하필 노조가 합법을 넘어 아예 상식이고 일상이 되어 버린 나라에 본사를 둔 푸르미가 그 무대가 되고 있을 것이다. 노조와 함께 하면서도 얼마든지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온 기업이 바로 푸르미였을 것이다. 그래도 되는 곳에서는 그래도 된다.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된다고 허용하고 있으니까. 회사에서 사적으로 고용한 용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매맞고 쫓겨나도 경찰들은 오히려 용역들의 편을 들고 있다. 법마저 철저히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의 편만을 들고 있다. 시민들도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도 그런 현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기업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이란 이토록 고단하고 각박하기만 한가. 당장 노동자들이 파엽을 해도 그들의 편에 서서 지지해주는 시민들이 드물다.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라 생각한다. 파업하는 노동자와 자기는 전혀 다른 존재라 여긴다. 노동자 가운데서도 원청인 대기업노동자와 하청을 받는 중소기업 노동자가 갈린다. 같은 직장 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다시 나뉘어진다. 그들 모두가 경쟁이라는 하나의 줄 위에서 각자의 번호표를 가지고 있다. 그 번호표야 말로 자신의 정체이고 존엄이다. 그 번호표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사회의 당위다. 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 회사의 부당한 횡포에 휩쓸리는 것이야 그냥 어디서나 있는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사용자측과 싸워 이기면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국가와 싸워야 하고, 사회 전체와 싸워야 하고, 사회를 이룬 다수의 시민들의 관성이 된 인식과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부서진다. 사용자까지는 어찌어찌 뚫어도 결국 사회 전체와 맞서싸우다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만다. 그나마 설 자리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당연하다. 그들은 반역자니까.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서진 채 산산이 흩어져버린 어느 노조간부의 가족들에게서 그같은 낭만과는 전혀 거리가 먼 불편한 현실을 확인하고 만다. 하필 막 노조를 만들고 희망에 들떠 있던 순간에 그런 장면들이 겹쳐지나고 있었다. 노조는 꿈이 아니다. 아니 더 지독한 악몽이다.
고문하는 장면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 아직까지 그 후유증으로 하루에 네 번 씩 만성신부전으로 투석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고문을 통해 사실과 전혀 다른 진술을 강요하고, 그리고 다시 그를 근거로 자신은 물론 주위마저 탄압하는 근거로 삼는다. 건국이후 수많은 간첩사건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최근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다른 곳도 아닌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밝혀지고 있었다. 그런 시절이 좋았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다수이고 주류이기까지 하다. 구고신(안내상 분)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고단함이야 말로 이 끝없는 싸움에 지치고 절망해가는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노조를 만들면 그겉으로 끝이 아니다. 부당하게 해고당할 위기에 있던 직원 한 사람 구했다고 노조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당장은 일동점의 점장과 임원들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본사가 있고, 앞서도 말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 사회의 다수 시민들이 있다. 아무도 자신들을 편들어주지도 이해하려고도 않는 고독한 싸움을 기약없는 시간까지 이어가야 한다. 이미 구고신도 어쩔 수 없이 고문이라는 참혹한 현실 앞에 꺾이고 만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고신(拷訊)이었을 것이다. 단지 버틴다. 문소진도. 구고신도. 구고신의 낡은 차도.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관성처럼 그저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다. 포기할수도, 그렇다고 끝까지 책임질수도 없는 싸움이다. 우연한 만남 앞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증언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현실보다 더 냉정하고 엄혹하다. 현실을 숨쉬며 살아가야 한다.
비슷한 비정규직의 고단한 일상을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미생'과 비교되면서도 결정적으로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미생'에서는 자기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같은 것이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노력과 실력을 알아봐준 상사를 통해 새롭게 기회를 얻기도 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재계약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있다가 오상식의 부름을 받고 그의 회사에 들어가 중동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하나의 카타르시스였다. 최소한 드라마를 보면서 꿈은 꿀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드라마 '송곳'에서도 그같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달콤한 꿈이란 것이 가능한가.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눕고, 이제는 행방마저 묘연한 채 아내가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야 하는 현실이 바로 이수인(지현우 분)의 미래일지 모른다.
다수의 시청자들이 기꺼워하며 볼 만한 드라마는 아니다. 불편하다. 무엇보다 피곤하다. 한 바탕 싸움을 마치고 난 듯 지쳐 늘어진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시청자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다. 알고 있다. 어디에도 출구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봐야 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누구와 함께 서 있는가를 깨닫는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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