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이 거의 일정한 농경사회에서 물가의 상승은 곧 실질소득의 감소로 이어졌다. 중세말 장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의지하던 봉건영주들이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있던 이유였다. 농민들 역시 더 이상 영주에게 낼 세금을 구하지 못해 차라리 예전처럼 현물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구한말 조선의 경제가 피폐해진 것도 갑작스런 개방으로 인한 시장의 요동을 탄력적으로 흡수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르다. 하기는 그래서 자본주의다. 기술의 혁명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생산을 가능케 해주었다. 원료와 자본과 공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많은 생산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물가가 오르면 오른 만큼 생산을 늘려 시장에 상품을 공급함으로써 가격을 하락시킨다. 가격이 하락하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고 생산자의 이익도 늘어나게 된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고용을 해야 하니 노동자의 수입 역시 비례해서 늘게 된다. 선순환구조다. 바로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생산의 증대가 소득의 증대로 이어지고, 소득의 증대가 소비의 증대로 이어지며, 소비의 증대가 다시 생산의 증대로 이어진다. 정확히 경제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화폐가 흔해지고 구하기 쉬워지며 가치가 하락한다. 더 많은 돈을 더 수월하게 벌 수 있게 된다면 화폐의 가치는 하락하고 상대적으로 물가가 오르게 된다. 무한히 반복된다. 자본주의란 무한생산과 무한소비를 지향하므로. 그에 따른 모순은 여기에서 다루려는 바가 아니니 일단 미룬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도성장기에 물가 역시 그에 비례해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었지 않으가. 그렇다고 물가에 대한 불만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소득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은행이자보다, 혹시라도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할 이자보다 소득의 증가가 더 가파랐다. 소득이 늘어나니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고, 소비가 늘어나니 그만큼 더 많은 생산이 공급되고, 생산이 공급되는 만큼 고용과 소득도 비례해서 늘어나며 다시 소비로 이어진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중개하는 도소매업이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서비스업 역시 비례해서 활성화된다. 경제가 성장하고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다. 이익이 있기에 너도나도 시장에 뛰어들고 경제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게 된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기대가 있다. 돈을 버는 것이 곧 동기고 동력이다. 그렇게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기와 욕망을 전제하는 것도 그래서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익이 있기에 그 이익을 쫓아 개인의 경제의 주체가 되어 시장에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생산자가 되고 소비자가 되며 중개자가 된다. 남들은 찾지 못한 이익을 찾아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기도 한다. 19세기 서구문명이 일으킨 제국주의를 다른 말로 시민제국주의라 일컫는 것도 그래서다. 국가가 주도하는 제국주의가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이익을 찾아 세계로 뻗어나가며 자발적으로 다른 문명을 굴복시키고 그를 노예화한다. 인도침략을 주도한 것은 영국 정부가 아닌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인도회사였다. 무력을 담당한 것도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용병이고 사병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에 있던 것도 바로 일본인 상인들이었다. 경제침략이 먼저고 군사적 정치적 침략은 그 다음이다. 개인의 이기와 욕망을 무한히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그 동기가 되고 동력이 되어 주고 있었다. 시민이 주체가 된다.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사실 실질구매력을 넘어선 수준의 인플레이션일 경우다. 경제성장과 소득증가를 넘어선 과도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결국 개인과 국가경제에 심각한 압력으로 작용하기 쉽다. 오히려 더 문제라면 디플레이션일 것이다. 소비가 위축되고 비례해서 생산도 위축된다.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시장 전체가 경색되기에 이른다. 일부러 소득도 제한하고, 물가도 낮추고, 그래서야 제대로 경제가 돌아갈 리 없다. 아마 전문가들이니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더 이상 노동자의 임금소득을 낮추거나 제한할 경우 - 설사 물가를 어떻게든 잡아 지출을 줄이더라도 결국 그것이 시장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정부에 의해 추진된 기업위주의 경제정책들이 정작 지금에 와서 내수경기의 악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정부는 경제위기를 타개할 대책으로 먼저 노동자의 고용조건과 임금부터 손대려 하는가. 노동자의 고용을 불안케 하고 임금소득을 줄임으로써 기업의 단기적 이익을 증대시키는데만 골몰하고 있는가. 생산원가가 낮아지면 비례해서 수출도 늘어난다. 한 마디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헐값에 해외에 팔아치우려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다. 정작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력이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헐값에 팔아치워 기업의 수입을 늘리고 지표만 상승시킨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단지 경제정책의 대상이지 목표가 아니다. 국가경제에 있어 이용하고 소모해야 할 대상이지 경제의 주체가 아니다.
그렇게 여겨왔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아니 조선왕조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라를 이루는 주체가 아니었다. 그나마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며 그 부분은 많이 개선되었다. 백성이 중요하다. 백성의 삶이 중요하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국가란 기업에 있어 국민이란 생산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과거 경제를 발전시켜 왔었다. 80년대 이전 아무것도 없는 나라 대한민국이 경제를 발전시켜 온 방법이었다. 이제 와서 과거를 되돌리려 한다. 다시 한 번 노동자를 도구로 삼아 쥐어짜서 예전처럼 경제를 일으켜 보겠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내수는 중요했다. 시장을 닫았다. 오로지 국적기업의 상품만을 소비하도록 강제하고 유인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그 폐허에서 지금의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알량하지만 내수라고 하는 확실한 시장을 확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이익을 얻으며 해외시장에 투자할 여력을 갖출 수 있었다. 당시 열악하던 국내기업의 상품들을 혹은 자발적으로, 혹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했던 국내의 소비자들이 아니었다면 대기업들이 지금의 규모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당장 가계소득이 한계에 이르고 오히려 부채가 증가하며 소비탄력성이 떨어지자 기업들은 내수의 악화로 인한 실적저하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줄이자고 말한다.
가계부채가 문제가 되고 있다. 하긴 나 역시 하우스푸어다. 본의는 아닌데 - 심지어 어디 가서 돈 빌리는 것도 꺼리는 타입인데 어쩌다 보니 빚을 대신 떠안아 하우스푸어 신세가 되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미국에서 금리를 올린다 한다. 내수는 악화되고 가계부채는 위험한 수준이다. 방법은 한 가지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돈을 시장에 푼다. 소득과 시장의 물가를 함께 올린다. 빚이 1억인데 5천원 하던 짜장면이 5만원이 되었다. 빚은 10분의 1로 줄어든다. 극단적인 예다. 빚을 갚을 여력이 늘어난다면 빚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폐가치가 떨어진 만큼 빚도 함께 줄어든다.
부채의 증가 만큼 소득이 는다. 소득이 늘면 따라서 당연히 물가도 오르게 된다. 그동안 낮은 임금과 늘어나는 부채로 소득을 억제해오던 것이 대부분의 국민들이었다.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몇 만원이라도 소득이 늘어나면 그만큼 소비가 늘어난다. 소비가 늘어나면 그에 비례해 물가도 모른다. 물가가 오르면 다시 그만큼 생산도 늘고, 참여자의 소득도 늘어난다. 빚은 줄어든다. 수출환경이 악화되는 지금 최악의 상황을 미루면서 장래를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최소한의 기업에게도 기댈 수 있는 시장이 확보된다.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국민 자신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쥐어짜라. 더 줄이고 더 아끼라. 잊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이 정부에서, 바로 이 정부의 경제각료가, 심지어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 말한 바 있다는 것을. 가계부채가 이미 한계에 이르러가고 있다. 사실상 지금 국내의 시장을 지탱하는 것은 가계의 소득이 아닌 부채인 셈이다. 더 쥐어짜고더 줄이려면 더 빚을 지는 수밖에 없다. 갚을 여력은 안되는데 빚만 늘어난다. 장차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국민에게 - 노동자에게 돈을 쥐어줘서는 안된다. 노동자를 안정적인 경제환경에 놓이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아, 저들은 국민을 목적이 아닌 그저 수단으로만 보고 있구나. 사실이다. 단지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리스트다. 단지 자신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ISIL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국민을 어떻게 여기는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위태하다. 기업의 실적은 악화되고 있다. 내수마저 경직되어 더 이상 생산한 제품이 팔리지 않고 있다. 그나마 내수를 지탱하는 것은 가계소득이 아닌 부채다. 그런데 그나마 노동자의 임금소득을 줄이고 안정성을 떨어뜨리려 한다. 노동자를 희생시켜 기업의 단기실적만 높이려 한다. 그 결과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절대 다음 대선에서 야당이 정권을 잡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IMF에서 겨우 살아났더니 그 원흉들이 하는 말이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정부와 여당이 망하는 게 아니라 야당이 망한다.
야당이 저렇게 집안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보가 될지언정 미친놈은 되지 말라 했었다. 입바른 말만 하다가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문재인은 바보가 되고 있다.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과연 어떻게 자신의 대표직까지 걸고 지켜낸 혁신안은 현실화시키는가.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상황이 다급하다. 대부분의 국민은 그것을 모른다. 그저 자기와 상관없는 노동자나부랭이들 월급 줄어든다니 속모르고 좋아할 뿐이다. 직장 잘 다니는 정규직들 비정규직처럼 해고 쉽게 된다니 아주 좋아 죽으려 할 뿐이다. 어쩌겠는가. 그런 것들도 국민인 것을.
미국에서 저리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처럼 여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줄 노조를 지원하려 한다. 노동자의 임금소득이 늘고 고용이 안정되었을 때 미국을 지탱하던 내수도 다시 더 살아나게 된다. 제조업이 다시 살아나려는 시점이다. 한국만 거꾸로 간다. 지적하는 놈들도 없다. 비판하는 놈들도 없다. 나만 급하다. 미래가 없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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