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드라마의 완성도가 재미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개연성이란 단지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한 한 요소일 뿐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렇게까지 드러내놓고 개연성을 무시하고 전개하는데 정작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저 재미있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사람의 집중력이란 한계가 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집중력을 한결같이 유지한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시청자의 인상을 지배하는 것은 드라마를 보면서 집중했던 결코 길지 않은 몇몇 순간들인 것이다. 그것이 드라마의 전부다. 어쩌면 드라마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용이 아닌 형식의 주제다. 집중할 수 있는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중해야만 하는 내용을 최대한 압축해서 보여준다.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을 몇이나 죽인 흉악한 살인범을 체포했다고 경찰까지 데리고 출동한 참이다. 아무리 실력좋고 경험까지 많은 베테랑 수사관이라 할지라도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범죄자인데 아무때고 만나면 일대일로 바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항상 자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거나 심지어 범인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다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더구나 신체적으로 불리한 여성이었다. 그렇게 많은 경찰이 출동했는데 정작 용의자를 뒤쫓다 공격받고 쓰러졌을 때 그녀의 뒤를 지켜줄 경찰 한 명도 동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아직 수배가 풀린 것도 아닐 텐데 그나마 모자조차 쓰지 않고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대낮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서진우(유승호 분)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박동호(박성웅 분)에게 잡힌 뒤 남규만(남궁민 분) 앞으로 끌려가 모든 증거를 빼앗기고 풀려났을 뿐이었다. 남규만의 지시를 받은 형사 곽한수(강영웅 분)의 권총에 하마트면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혐의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이인아가 형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새림로로 출동했던 것도 하루라도 빨리 서진우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였다. 서진우가 알아낸대로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들의 범인이 동일인이고 서진우가 혐의를 받고 있는 살인사건의 진범이라면 그를 잡아야만 서진우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서진우가 같은 시간 밝은 대낮에 얼굴까지 당당히 드러낸 채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물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무척이나 조심하던 그 서진우가 말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부패한 형사 곽한수가 바로 눈앞에서 서진우를 놓아주는 장면도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박동호는 단지 권총으로 쏘아 죽이려는 것을 말린 것 뿐이었다. 형사로서 무고한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쳐서는 안된다 경고한 것 뿐이었다. 어차피 살인용의자로 수배되어 있는데 경찰로서 체포하여 경찰서로 끌고가는 것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다. 죽일 수 없다면 살인자로 만들어 법정에 서게 한다. 유죄판결을 받도록 이미 모든 준비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단지 박동호가 서진우를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섰다고 서진우가 도망치는 것까지 그대로 지나치고 만다. 결국 서진우는 박동호의 도움만이 아닌 곽한수의 방관에 힘입어 죽을 뻔한 위기에서, 아니 경찰에 살인자로 체포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또한 의도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세세한 과정 따위 주인공이 결국 겪게 될 위기와 탈출이라는 극적인 장면들로 인해 어느새 철저히 잊혀지고 만다. 당장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고, 그리고 마침내 어렵게 벗어날 수 있었다. 주인공 서진우가 남규만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살인자로 몰리고, 궁지에 몰린 끝에 일호생명 부사장의 변호를 맡은 대가로 얻은 비자금 장부를 공개하여 반격하려 하고, 그마저 박동호에게 먼저 위치가 들통나 좌절당한 채 목숨의 위협까지 받게 된다. 겨우 박동호의 도움과 곽한수의 방관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오고 나면 그다음에는 잠시 한숨 돌려도 된다. 어떻게 박동호가 서진우가 방송을 내보내는 위치를 알았는가는 그냥 건너뛰고 만다. 남규만의 악의가 있고,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서진우의 억울함과 절박함이 있다. 분노와 증오가 있다. 그래서 여전히 박동호도 안수민(이시언 분)도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어떻게 되어도 좋다. 때가 되면 필요한 만큼 요긴한 만큼 그들에게도 명확한 역할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사실 이번 방영된 내용에서 함정이 하나 있었다. 남규만이 서진우로부터 비자금장부가 저장되어 있는 USB와 노트북을 빼앗아 모든 증거를 파기하고 만다. 이제 더이상 서진우에게 남규만과 그의 뒤에 있는 일호그룹을 공격할 수단따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사무실의 비밀방에 남겨두고 온 그동안의 사건자료들을 고스란히 재현해낼 수 있는 절대기억의 소유자가 바로 서진우였다. 서진우의 기억만 남아있다면 한 번 보았던 자료는 그대로 고스란히 복원해낼 수 있다. 우연히 스치고 지나간 살인사건의 진범마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끄집어낼 수 있었던 그 서진우였다. 아직은 필요없다. 너무나도 강한 남규만과 한일그룹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남규만과 박동호 사이에 균열이 보인다. 남규만이 폭주하고 있다. 바닥이 없다. 끝이 없다. 남규만 자신의 탓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인간이 삼가고 조심하려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이 실수할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사게 될 것이 두려우며, 결국 그때문에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와 책임이 자신을 주저하게 만든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거나 괴롭혀서도 안된다. 그러나 과연 그동안 누가 남규만에게 그런 것들을 진심으로 가르치거나 충고하려 했던 적이 있었던가.
"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되요."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신을 대신해서 사형수가 된 서재혁(전광렬 분) 앞에서 정의와 도덕을 떠들고 있었다. 억울한 참회와 반성마저 비웃으며 끝끝내 사죄의 말을 듣고 만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는 남규만의 뒤에서 안수민이 무심코 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남규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조차 안수민은 쩔쩔매며 두려워한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오로지 박동호만이 남규만 앞에서 할 말 다하며 훈계도 충고도 할 수 있다. 아니 균열이 아닐지 모른다. 뜻밖에 그토록 제멋대로이던 남규만이 박동호에게만큼은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균열은 아니지만 언젠가 서진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선명한 악역이 있고, 분명한 동기를 가진 주인공이 있다. 위기도 기회도 너무 명확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나쁜 놈이다. 응원하고 싶은 가엾은 사람이다. 당장의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에 함께 발을 동동이며 안타까워하고, 겨우 손에 쥐게 된 기회를 힘을 주어 응원한다. 나머지는 그저 구구한 곁가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편들고 응원하고 싶은 주인공이 있고, 함께 미워하고 분노해야 할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단순함이 더 쉽고 더 편하게 드라마에 안착하도록 만든다. 다른 것은 필요없다.
역시 예상할 수 없다. 박동호야 말로 인간이 가지는 모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서진우를 연민한다. 남규만에 분노한다. 하지만 끝내 남규만의 위력에 굴복하여 서진우를 또다시 배신하고 만다. 서진우를 죽음의 위기로 몰고 다시 몸을 던져 서진우를 구하고 도망치게 만든다. 서진우가 선을 넘는 것을 막고자 다시 진범을 찾아나선 서진우의 뒤를 쫓는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안수민의 선량함 또한 무기력하고 비겁한 그의 복종에 가려버리고 만다. 남일호(한진희 분)의 돈에 매수된 검사 홍무석(엄효섭 분)이나 남규만의 돈에 굴복한 형사 곽한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더 적극적이거나, 혹은 그보다 덜 적극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선도 악도 없다. 정의도 진실도 없다. 법이 범죄자의 편에 서고, 공권력이 그 범죄를 돕는데 앞장선다. 심지어 무고한 시민을 법을 집행해야 할 경찰이 직접 총으로 쏘아 살해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그럼에도 정의를 믿고 진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어리석고 무지해 보인다. 그들의 무책임한 외면 속에 무고하게 죄인이 되어 쫓겨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인정에 기대며 원망과 증오만을 쫓는다.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무겁고 우울하다.
기회가 모두 사라진 것은아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 허무하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서진우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가진 것의 차이가 너무 크다. 박동호라는 벽이 너무 높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드라마도 아직 남아 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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