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이란 보편의 규범이다. 하나의 사회에서 구성원 일반이 따르도록 강제된 경험적 관습적 정의다. 개인의 사정보다 우선하며 개인의 판단보다 우위에 있다. 오히려 사회의 일반으로 하여금 개인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도록 한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가를 끊임없이 사회의 일반에 물어야만 한다.
하지만 예절은 다르다. 예절은 상호적인 것이다. 서로 주고 받는 사이에 임의로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 역시 예에 대해 묻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이기에 항상 마음을 다하여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 그런데 늙어서 몸도 못가누는 부모가 가장 바라는 것이 자식인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하는 것이다. 과연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발을 씻기도록 하고, 굳이 번거롭게 상을 차리도록 시키는 것은 효인가? 불효인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격의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트고 지내기를 바란다. 부모에게는 반드시 존대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징그럽다면서 반말을 하기를 요구한다. 남매간에, 부자간에, 혹은 모자간에 서로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입을 맞춰 왔다. 그에 대해 누군가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들이 상관하기 전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표현해 왔을 것이다.
바로 싸가지론이 나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간단히 나이 많은 어른에게 바른 말을 했을 때 어른들은 어찌 반응하는가? 이성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아직 지적인 호기심과 열망이 남아있다면 아무리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대라 할지라도 더 나은 답을 찾아 토론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혜를 상대가 가진 직관과 지식과 비교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더 나은가를 가리며 그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인간의 지성은 그렇게 진화해 했다. 하지만 모든 어른들이 그러한가?
말이 막히니 결국 예의범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위아래를 앞세우고 마는 것이다.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더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권위로써 상대를 찍어누르고 말겠다. 그리고 그때 그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으 자신과 상대와의 사이의 관계다. 어찌되었든간에 자신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 자신이 우위인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이든 정의든 진실이든 진리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신이 우위에 있다 해서 함부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규범, 예절인 것이다. 어찌 나보다 열위에 있는 상대가 자신에게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인가.
즉 예절과 도덕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예절이라는 행위로써 강제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조선중기 사대부 사이에 예학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각각의 행위를 사회적 위치와 지위에 따라 세분하여 미리 정의한다. 그 안에서 개인은 오로지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신의 도덕적 우위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생각마저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 우위로 이어지고 만다. 감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감히 연예인이 대중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감히 장사꾼이 손님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일개 종업원따위가 손님에게 말대답을 하는 자체도 이미 불경이다. 하라면 해야 한다. 시키면 따라야 한다.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대중이다. 개인이 아니다. 자신이 아니다. 그들에게 표를 주고, 그들이 쓴 작품을 소비해주는 대중으로써 자신이 도덕적 우위에 서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절대 자신들을 가르치거나, 자신들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버릇없고 예의없고 경우없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결론짓고 심판한다. 그에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면 어차피 처음부터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들을 생각도 인정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내가 생각한 것이 정답이고, 내가 내린 결론이 정의다. 그에 맞춰야 한다. 그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단지 방송에 나와서 시키는대로 애교를 보이지 않았다며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인가는 오로지 연예인과 대중인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된다. 대중인 자신이 보기에 잘못되었으니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
싸가지론이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들을 생각이 없다. 인정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 핑계로 싸가지를 들먹인다. 상대와 자신과의 관계를 전제로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강제하려는 태도로써 모든 판단을 대신한다. 더이상의 판단은 없다. 더이상의 대화도 없다. 상대는 자격을 잃었다. 자격을 잃었으므로 그 모든 말과 행동은 가치와 의미를 잃었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정의를 겨루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더 나은가를 겨루고 견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옳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정의는 도덕과 마찬가지로 - 아니 도덕조차 초월하여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보편의 세계에 적용되는 절대의 규준이다. 그것이 개인의 예절차원으로 끌어내려진다. 태도를 조심하라. 표현을 조심하라. 행동을 조심하라. 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의도일 것인데.
그리고 덧붙이자면 때로 어떤 사람들은 준법과 도덕을 같은 가치로 여기기도 하는데, 사실 이 또한 서로 상관없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법이란 법을 정하고 집행하는 정치기구와 개인의 상호적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법이 도덕적 가치나 규범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들은 대개 정치기구의 편의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치나 규범 현실의 이해와 맞지 않는 때도 그 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인가. 위법에 대한 판단도 그를 전제로 세분화해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시민으로서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의무가 맞지만, 법의 세부내용에 대해서 반드시 개인이 일방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가는 또 별개의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아무튼 결국 핑계라 할 수 있다. 그저 자기가 책임지기 싫은 것이다. 자신의 판단이고 선택이고 결정인데 오로지 자신만의 결론으로 내세우기에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확신이 없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이 있다. 빈곤한 자아와 자존이 작은 양보조차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자신이 훼손되는 것 같고 가치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책임을 떠밀 대상을 찾는다. 자신이 옳지 않다 말하는, 자신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틀렸다 말하는 괘씸한 그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비웃어주라는 말이다. 아무리 태도를 말하고 싸가지를 말해도 그 근본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고 앙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이 대단하가 꾸미고 치장하고 싶다. 네가 잘못했다. 너의 잘못이다. 자신은 책임이 없다. 항상 안전한 곳에서. 내가 우위인 이곳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 비겁함이고 비굴함이다. 저열함이다.
너의 탓이다. 너의 잘못이다. 내가 그리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다. 네가 결론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무어라 어떻게 말했든 결국 자신이 결론짓고 그렇게 행동에 옮긴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자신의 책임이다. 그것이 전부다. 웃는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예절은 도덕이 아니다. 정의도 아니다. 가치도 규범도 아니다. 그냥 약속이다. 서로간에 정해진 격식이다. 조금 서툴고 조금 틀렸더라도 딱 그 정도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 정도는 괜찮다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정중하고 엄격한 것만이 항상 전부는 아니다. 어디나 적용되는 이야기다. 항상.
'문화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죄악인 이유... (0) | 2016.02.22 |
---|---|
문득 경제학... (0) | 2016.02.22 |
임산부석의 이유... (0) | 2016.02.05 |
KBS 다큐멘터리 '미국의 부활'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화나게 하는 장면... (0) | 2016.01.25 |
진화론과 문명... (0) | 201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