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너무 흥분했었다. 너무 어이가 없다보니. 이해가 된다.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들으며 작년 말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만놈들이 다 당대표 물러나라 지랄거리고 있었다. 문재인이 물러나야 한다며 압박하고 있었다. 물러나기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존의 당소속 국회의원 가운데 한 사람은 안된다. 계파를 떠난 다른 누군가여야만 총선까지 당을 안정시킬 수 있다.
아마 기억할 것이다. 그때 문재인은 선대위장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영입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가 고사하고 있었다 심심하면 지도부를 흔들어대는 정당에, 더구나 지지율까지 위태로운 상태로 들어가봐야 좋은 꼴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다하다 국민의당과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박영선도 잡을 겸 김종인에게까지 손을 내밀었던 것이었다. 하기는 나도 당시는 박영선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었다. 박영선까지 넘어가면 더민주는 힘들어질지 모른다. 역시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그래도 믿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힘들게 지켜낸 혁신안이 있었으니까. 당헌과 당규에 명문화된 혁신안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당운영을 가능케 할 테니까. 설마 그마저 당무회의를 통해 전권을 받고 무력화시킬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분명 내부에 바람을 잡은 놈들이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외부인사가 당헌과 당규에 대한 해석과 변용의 전권을 달라는데 만장일치라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바람을 잡고 주도하여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내의 누군가다. 그리고 당무회의를 통해 당헌과 당규까지 고쳐 시스템공천을 무력화시킬 것을 제안한 누군가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안될 것이라 유시민은 일찌감치 예언했었다.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도 더민주 국회의원 가운데 보다 민주적인 당운영에 대해 믿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간에 이미 혁신안이 나와있는데 그것을 지키려는 국회의원이 두자리 수는 될 것이다. 웬걸. 자기자리 지키기나 급급하지 정작 당의 시스템따위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 화가 났다가 어이가 없다가 이제는 아예 담담하다. 알면서도 또 속는다.
다시 원래의 민주당으로 돌아간다. 아니 더 나쁘다. 그나마 그동안은 여러 계파들이 당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더 진보적인 인사들도 있었고 더 보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시끄럽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려나간다. 조금 목소리 크고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여지없이 잘려나가고 만다. 2008년의 패배 이후 움츠렀던 비주류가 전면에 나서며 당의 정체성까지 바꾸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과연 더민주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가운데 다수는 확실한 경쟁력을 갖춘 정치인들이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당권은 가져야겠다.
공당이 아니다. 사당이다. 개인의 권력욕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당원은 무시당한다. 내가 더민주 당원가입을 끝내 망설인 이유가 열린우리당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도 당대표가 정동영이었다. 정동영과 함께하던 것이 김한길이었다. 김한길과 함께한 것이 또 박영선이었다. 일정한 조직만 확보하고 있으면 당을 자신의 입맛대로 얼마든지 조종하고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정당을 지지해야 하겠는가. 이길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당이 된 더민주를 야권지지자들이 좋아서 지지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유시민의 말처럼 어쩌면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제 1야당은 안에서부터 무너져내릴 지 모른다.
문재인이 나서야 하는 이유다. 김종인이 약속을 어겼다. 선거에서 이겨달라고 했지 혁신안까지 무시하라 말한 적 없었다. 자신이 지켜낸 혁신안에 따라 선거를 바르게 잘 이끌어달라 한 것이지 그것을 무시하고 부수라 말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면에 나서서 김종인과 대립했다가는 그나마 남은 알량한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전에도 말했다. 문재인에게는 누구도 갖지 못한 아주 훌륭한 무기가 있다고.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유력대통령후보이자 야당내 상당한 고정지지층을 보유한 실세로서다.
스스로 당을 나온다. 만일 친노와 운동권이 당을 위해 선거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물러나 짐을 덜어주겠다. 내건 명분과 실제 이유가 다르다. 당을 위한다지만 결국은 항의표시다. 아무리 제멋대로 막나가는 김종인이고 박영선이라지만 현재 지지율 1위의 유력정치인이 자진탈당하는 것까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말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때대로 더민주는 끝이라 여기면 된다. 야당이 각자도생하듯 지지자들도 각자도생한다. 더이상 더민주와 함께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더민주 안에서 행동에 나서는 국회의원이 한 사람은 있을 줄 알았는데. 유시민의 말을 듣고 설득당할 뻔했다. 하지만 그때도 유시민은 나같은 당원들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현실이다. 문재인이 나선다면 어쩌면 마지막 기대를 걸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지막 싸움에 한 번 나서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훌륭한 리더란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희망을, 신뢰를 주는 사람이다. 가장 필요할 때 가장 간절한 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결국 문재인의 탓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몰린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문재인이 져야 한다. 전당대표였고, 김종인을 데려온 당사자다. 당의 유력대선후보로서 책임도 있다. 자신을 믿고 가장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었던 영입인사들에 대한 책임도 있다. 그마저 저버린다면 문재인은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김종인에 대한 의리보다 우선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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