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너무 오만했다. 야권이 분열하면 당연히 자기들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민주 잡겠다고 국민의당을 띄우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가지로 새누리당에 불만을 가진 지지자들이 국민의당을 자기 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래도 더민주에 표를 줄 수는 없으니 국민의당에 표를 주자. 안철수는 참 편하게 정치한다. 야권 정치인 가운데 이처럼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호의적으로 대하는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아, 야권 아니던가? 스스로 야당이 아니라 선언했으니.
둘째 국민의당의 비례투표는 위의 경우에 더해 김종인과 비대위의 비례대표 삽질에 기인한 바가 크다. 통진당 사캐 이후 제 1야당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비토와 경계가 무척 심해졌다. 예전이라면 제 1야당 싫으니 진보정당에 표를 주는 사람도 나왔을 텐데 그럴 수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국민의당에 표가 쏠리고 만다. 아직 한국 정치인들은 비례대표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는 지역구이고 비례대표는 보너스 정도로 여긴다.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비례대표 투표를 통해 그것을 표출한다. 국민의당에 대한 지지율과 비례대표 지지율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고도 더민주의 승리가 자기 때문이라 한다면 양심이 없느 것.
셋째 그럼에도 김종인이 제 밥값은 했다. 더민주의 득표에는 기존의 지지층에서 호남이 빠진 대신 상대적으로 비호남의 보수유권자들이 더민주에 표를 준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막무가내식 우클릭으로 인해 빠져나가려던 기존지지자들을 붙들어맨 것은 바로 문재인이었다. 나 역시 이번 선거 포기할까 하다가 문재인이 전면에 나선 것을 보고 더민주에 투표할 생각이 들었으니까. 최소한 호남에서는 효과가 없었어도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문재인으로 인한 효과가 있었다. 애써 폄훼하고 싶은 것이 김종인과 선대위일 테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재인이 영입한 인사들 대부분이 양향자를 제외하고 당선하거나 매우 선전한 결과를 보였다. 색깔론에 휘말리지 않도록 한 것도 공적이라면 공적.
넷째 결국 호남은 더민주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용섭마저 떨어졌다. 그토록 제 1야당의 호남홀대를 비토하더니 제 야당소속이던 정치인들을 그대로 당선시켜주었다. 한 마디로 더이상 제 1야당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제 1야당과 함께가느니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을 가지겠다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덕분에 영남과 비호남의 지역구에서 더민주가 더 선전할 수 있게 되었다. 호남차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호남에 대한 멸시와 적대감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다. 더민주는 바로 그런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끌어안고 비호남지역에서 새누리와 맞서야 했었다. 그래야 한다고 여겼었다. 80년대 이후 광주는 특히 야권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원죄와도 같은 부채의식을 심어주었으니까. 호남과 함께 승리해야지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호남이 먼저 거부해 버렸다. 더민주는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호남을 의식하지 않고 전국에서 새누리와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었다. 호남은 이제 우호적 동반자 정도로 여기면 충분하지 않을까.
다섯째 그래서 문재인의 은퇴 이후가 걱정이다.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상당한 선전을 하며 승리라 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지만 단지 호남의 비토만으로 야권의 유력대선주자가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야권과 호남의 거리가 벌어진다. 호남에 대한 부채의식은 남았더라도 더이상 호남과 동질감을 가지기란 어려워졌다. 더구나 호남이 선택한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비호남의 야권 지지자들이 비토하는 인물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토하고 서로가 비토하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국민의당을 중심으로 호남은 어쩌면 영영 분리된다. 국민의당과 더민주의 재통합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다. 무엇보다 양당의 지지자가 서로 원하지 않는다.
여섯째 일단 문재인은 은퇴를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영구적인 은퇴는 아닐 것이다. 문재인이 영입한 인사 다수가 사지에서 살아돌아왔다. 설마 조응천까지 당선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손혜원도 어려울 것이라 보았었다. 더민주와 지지자들이 아무리 문재인 자신이 원하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수도 없이 추가되었다. 더민주 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이 하나같이 문재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문재인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었다. 이제 비로소 더민주의 진짜 실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한시적으로 당권을 장악한 김종인이나 선대위가 아닌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문재인이다. 하지만 이미 해놓은 말이 있으니 모양새는 취해야 한다. 한 1년 푹 쉬면서 재충전하면 주위에서 부를 것이다. 호남에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까. 호남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를 주저앉혔다는 책임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일곱째 호남을 잃고 영남을 얻었다. 비로소 수도 없는 헤딩 끝에 겨우 영남에서 유의미한 의석을 얻었다. 조경태 하나 내주고 그 몇 배의 의석을 찾아왔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호남이 떠나니 영남이 다가온다. 영남이 다가오려니 호남이 떠나간다. 바로 망국적이라 말하는 지역주의의 실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 호남에는 영남이 족쇄가 되고, 영남에는 호남이 족쇄가 된다. 그 정확한 한가운데 더민주의 - 제 1야당의 주류가 있다. 원래는 호남정치인들이 주류였지만 전국정당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주류가 되었다. 호남으로부터 버려지고 영남으로부터 받아들여진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덟째 안철수의 이후를 걱정한다. 총선 전에야 공천이 걸려 있었다. 더민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역할도 주어졌었다. 그래서 소속정치인들도 보수여론도 안철수와 국민의당에 최소한 방관적이었다. 총선이 끝났다. 최소 4년은 공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호남에서 국민의당이 압승한 것은 호남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실력이었다. 보수언론도 만에 하나 자신들에 위협이 될 것 같으면 국민의당과 안철수를 그냥 보고 있지만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수언론을 쫓아가면 자신의 지지층과 유리된다.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어설픈 양비론으로 지지율을 까먹은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지역주의를 부추겨 지역정당으로 안주했다고 하는 딱지다. 오른쪽으로의 확장성은 몰라도 왼쪽으로의 확장성은 끝이다. 문재인이 진짜 은퇴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 진짜 최악의 정치는 안철수가 보여주었다.
아홉째 역시 새누리당과 똑같은 오판인데. 정작 호남홀대론은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더민주에 대한 호남당이라는 인식을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안철수의 계획은 호남을 잡고 더민주를 몰락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더민주는 오히려 영남에서도 선전하며 전국정당으로 도약하고 말았다. 호남을 기반으로 전국정당으로 도약한 더민주와 대권을 경쟁해야 한다. 쉽지 않다. 새누리당으로의 확장성은 보여주었지만 마찬가지로 더 왼쪽의 야권지지자들의 더 강한 비토를 받게 되었다. 호남당이라고 하는 족쇄와 지역주의를 이용했다고 하는 낙인을 과연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친노가 호남당이라는 낙인을 이겨내기까지 걸린 세월이 무려 십수년이다. 더민주는 탈출에 성공했다.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자유로워졌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래서 개표방송도 보지 않았었다. 않으려 했었다. 설마... 그런데 다시 설마...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공천을 마음대로 한 누군가이고, 그럼에도 국민의당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편으로 여기도록 부추겼던 또다른 누군가들일 테고, 그리고 역시 공천으로 곤두박질친 지지율을 혼자서 끌어올린 이제는 물러나야만 하는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래도 내 한 표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혼자서 흐뭇하다. 이대로 끝나기를. 너무 기쁘다. 호남을 잃은 건 아쉽지만, 그러나 호남에는 호남의 길이 있을 테니까. 존중한다. 이제부터는 따로 간다. 부디 좋은 일 있기를. 한때 동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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