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녀보감 - 버려진 딸의 신화, 모두를 구하는 약속

까칠부 2016. 6. 18. 04:59

아주 오래전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것이 오로지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은 자식들에게 어머니였다. 대부분의 남성 역시 어머니의 아들로서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중심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성에 의해 여성은 어머니에서 아내로 격하되었다.


처음 신과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도 여성이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특별함이 여성에게 신성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신도 여성이었고 그 신을 모시는 사제들 또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역시 어느 순간 세속권력을 장악한 남성에 의해 역전되었다. 신도 신을 모시는 사제도 여성은 단지 남성에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기억이 잊혀진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성은 버려졌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처음 있던 그대로 여성이 다시 돌아와 세상을 구하게 될 것이다. 버려진 딸들이 자신을 버린 아비들을 구하듯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아비와 가족을, 세상을 구하는 것은 아들이 아닌 바로 자신들 세상이 버린 딸들이다.


대비 심씨(장희진 분)가 굳이 천리를 어겨가면서까지 아이를 낳으려 했던 것도 아들을 통해 대를 이으려는 가부장적 구조의 억압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단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 여성이 낳은 아이들을 통해 남성은 자신의 성취와 지위를 물려주어야 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가치가 없다.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낳아야지만 여성으로서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이를 낳아야 하고, 만일 낳은 아이 가운데 하나만을 살려야 한다면 딸이 아닌 아들을 선택해야만 한다. 대비 심씨는 그 순간 어머니가 아닌 단지 여성이며 대를 이을 아이를 낳는 자궁에 불과했었다.


어째서 자신은 버려졌는가. 구구한 설명보다 단지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만이 귀에 들어온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 아들 대신 자신을 버렸다. 자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공주가 되어 있었다. 왕실을 구하라 한다.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버려지게 만든 왕실을 이제와서 자신더러 구하라 요구한다. 가혹한 운명이 서리(김새론 분)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이미 서리에게 지워진 운명은 홍주(염정아 분)와 맞서 왕실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홍주의 음모로부터 왕실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리 자신에게 씌워진 저주를 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리의 운명으로 인해 왕실은 마침내 구해지게 된다.


하필 그 서리를 막아서는 것이 남성인 국왕(이지훈 분)과 의붓오라비 풍연(곽시양 분)이었다. 아무리 외모가 바뀌어도 서리는 연희였다. 이름이 서리로 바뀌었어도 연희는 풍연이 알던 연희가 맞았다. 그러나 단지 외모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풍연은 어느새 또다른 연희의 존재를 부정하고 말았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래서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의 연희만이 연희다. 그렇지 않은 연희는 연희가 아니다. 연희는 처음부터 하나였는데 풍연의 일방적인 이기가 그것을 거부한다. 연희를 둘로 나누고 그 가운데 하나를 지우려 한다. 간절히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냉정히 돌아선다. 자신이 인정하는 연희만을 인정할 수 있고 그런 연희만을 사랑할 수 있다. 연희는 오로지 풍연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고 존재할 수 있다.


하기는 홍주가 왕실에 저주를 내리려 음모를 꾸미는 이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홍주 또한 여성이었다. 여성으로서 특정한 대상에 대해 원한을 품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동안 홍주의 음모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최현서(이성재 분)가 정작 그녀의 앞에서는 그녀를 연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로지 왕실만을 위하는 충신조차 왕실을 농락하는 홍주를 동정하게 만드는 어떤 사연들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필연적으로 남성중심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기 쉬웠다. 남성을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자궁으로서의 책임감이 대비로 하여금 모성을 저버리는 패륜을 저지르게 만들었듯, 여성이라는 홍주의 정체가 그녀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홍주의 악의가 다시 왕과 풍연이라는 두 남성을 움직여 왕실을 구하려는 서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그러면 홍주의 음모로부터 왕실을 구하게 되는 서리는 과연 여성으로서일까? 아니면 모성으로서일까? 대비는 모성을 앞세워 서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서리를 설득하는 대비는 어머니가 아닌 대비이고 왕실을 지켜야 하는 도구다. 한결같이 허준(윤시윤 분)이 서리의 곁을 지킨다. 다행히 서리는 다른 공주들처럼 혼자가 아니다. 의붓아버지인 최현서는 자신을 단지 공주로서만 대하지만 단 한 사람 허준은 자신을 한 사람의 여성으로 인간으로 대해준다. 자신을 지켜준다. 구원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까이 있는 허준에게 있다.


잊혀진 기억이 신화를 만든다. 실재했던 사실들이다. 그러나 어느새 잊혀진 진실이다. 마침내 서리를 찾아낸 홍주로 인해 허준이 위험에 빠진다. 서리가 분노한다. 홍주가 억지로 이어 놓은 최현서의 목숨도 한계에 이른다. 풍연의 고민은 깊어진다. 비극이 자라난다.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