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스토리(1970)'에서 여주인공 제니가 남긴 명대사가 있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Love is never to say I'm sorry)"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이란 단지 사랑한다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미안함도, 섭섭함도, 그리움도, 원망도, 아쉬움도, 미움도, 희망도, 기대도, 그 모든 감정을 오로지 이 한 마디에 담아 들려준다. 미안해서 사랑하고, 섭섭해서 사랑하고, 그리워서 사랑하며 원망하면서도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마 이것이 오해영(서현진 분)이 처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박도경(에릭 분)에게 오히려 더 크게 화를 냈던 이유였을지 모르겠다. 미안하다는 말은 완결형이었다. 오로지 과거의 잘못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저 지난 잘못들에 대한 미안함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그리고 앞으로, 그가, 혹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란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결혼을 깰 것이고 그래서 다시 자기의 옆집에 와서 살게 만들 것이다. 만나고 사랑할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불행해지더라도, 크게 상처입고 고통받게 되더라도,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라도 다시 만나서 사랑에 빠질 것이다. 자신이 과거 저질렀던 잘못들과는 상관없이 이대로 끌어안은 채 마음껏 뒹굴고 말 것이다. 거칠고 무례하지만 그것이 박도경의 진심이었다. 오해영이 그의 뒤를 쫓아 달려가 안긴 이유였다. 그녀가 듣고자 했던 한 마디였다.
그래서 한태진(이재윤 분)에게도 당당히 미안하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차라리 대가를 치르라면 치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태진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예쁜오해영(전혜빈 분)에게는 벌써 오래전에 박도경이 먼저 미안하다 말한 바 있었다. 이번에는 예쁜오해영이 박도경에게 미안하다 말한다. 돌아서서 홀로 울면서도 차마 박도경의 뒤를 쫓지는 못한다. 이제 그들의 사이는 끝났다. 절실했던 그들의 사랑은 지난 시간의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더이상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반전처럼 예쁜오해영 역시 그냥오해영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예쁜오해영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인정받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에 비하면 그냥오해영은 느긋했다. 굳이 더 인정받으려고도, 더 사랑받으려고도, 악착같이 모두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로소 어렴풋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실체를 깨닫는다. 하지만 정작 그냥오해영은 주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악착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 숨을 곳이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가 있었다.
박도경 앞에서 예쁜오해영은 도망쳤다. 그냥오해영은 오히려 도망치는 박도경을 끝까지 쫓아가 붙잡았다.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쉽게 하찮게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동정이든 무엇이든 박도경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사랑한 이후를 걱정하지 않는다. 설사 사랑이 불행으로 끝나더라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마음껏 사랑한다. 마음껏 응석을 부린다. 의외로 더 강한 것은 그냥오해영이었다. 거칠고 열악한 환경이 아닌 마음껏 기대고 응석부릴 수 있는 따뜻한 부모의 품이 그냥오해영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냥오해영 - 아니 이제는 단 한 사람의 오해영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당하다. 예쁜오해영의 말에 공감한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진심으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부모의 승리다.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든든히 오해영의 등을 지켜봐주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는 부모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있어 오해영은 사랑스러울 수 있다.
과연 미래는 바뀌었는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과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과거가 진짜 과거인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다. 미래가 바뀐 것이 아니라 과거가 바뀐 것이다. 그마저 원래의 과거가 바뀐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다. 아직 남아 있는 미혹이 실제의 과거와 다른 과거를 회상처럼 보여준다. 기억처럼 믿기 어려운 것도 없다. 특히 큰 의미가 담긴 기억일수록 그렇다.
마침내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 역시 박수경(예지원 분), 박도경, 박훈(허정민 분)은 남매였다. 부모로 인한 상실과 결여를 서로의 존재가 대신해준다. 대신 화내주고 대신 싸워준다. 이진상(김지석 분)이 박수경이 기억하던 귀여운 고등학생에서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인가. 단지 아이가 생겼다고 결혼하는 것은 지금 기준에 너무 촌스럽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혼자서 기를 수 있는 박수경이 단지 아이를 이유로 한 남자에게 얽매인다. 이유가 필요하다. 결혼이란 인생의 서사다.
사랑한다. 사랑하며 사랑한다. 때로 무모하다. 단지 근무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빼내기 위해 경찰을 사칭하여 큰 소란을 일으킨다. 이름을 불러준다. 그가 불러주는 이름을 듣는다. 사랑에는 다른 말은 필요없다. 필요이상으로 달달하다. 여름밤은 덥다. 바람은 시리다. 어떤 이유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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