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한참 늦은 '부산행' 감상...(스포일러 왕창)

까칠부 2016. 9. 19. 01:58

일단 전제할 것은 이 영화는 철저히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하긴 원래 대중성이란 자체가 남성주의와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이 세계 자체가 남성에 의해 철저히 남성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성성이란 남성에게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이상이며 여성에게는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다. 가족주의란 바로 그같은 남성성에 기반한 가부장주의를 뜻한다.


영화 '부산행'의 이른바 신파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입장이 갈리는 지점이다. 그같은 남성주의적인 남성성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남성은 여성과 아이를 지키는 존재다. 남성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성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헤야 하는 존재다. 하물며 임신한 여성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영국(최우식 분)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좀비로 변한 진희(소희 분)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끝내 자기의 여자를 지키지 못했으니 마지막이라도 함께 하겠다.


상화(마동석 분)은 임신한 자신의 아내 성경(정유미 분)과 일행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좀비들을 막다가 자신도 좀비로 변한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혼자 남아 문을 막아서면서 아내에게 전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은 그같은 남성성이 추구하는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며 그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마지막에 다 와서 석우(공유 분) 역시 상화의 아내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기차에서 뛰어내려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딸을 살릴 수 있었다.


마지막 터널을 지나면서 석우의 딸 수안(김수안 분)이 아빠에게 미처 들려주지 못한 노래를 울먹으며 부를 때 그만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고 만 이유였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죽은 남편과 아버지를 그리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보다는 지독한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지켜줄 남편과 아빠는 더이상 세상에 없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서, 그래서 북받치는 그리움과 슬픔에 겨워서, 아무도 없는 어두운 터널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두 사람은 살았고 살아서 무사히 목적한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의미있지 않은가. 자신의 희생음. 남성의 희생은. 그들이 희생한 것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것이 처음부터 아빠 석우는 딸 수안을 마음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딸 수안 역시 마찬가지다. 일과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석우가 일로 바쁜 와중에도 딸을 위한 선물을 부하직원에게 묻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회사로 돌아가 급하고 중요한 일들부터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상태에서도 어찌되었거나 딸을 위해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는 KTX에 함께 오르고 있었다. 바로 KTX에 오르고 나서 부하직원에게 건 전화에서 오후면 다시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말하던 그 일벌레가 정작 혼자서라도 엄마를 찾아가겠다는 딸만큼은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었다. 좀비의 습격이 시작되고 나서도 내내 석우의 눈이 팔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딸 수안이 있는 곳이었다.


딸 수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빠를 위해 발표회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했었다.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노래를 중간에 그만두고 있었다. 차라리 아빠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면 그런 식으로 보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운 만큼 외로운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반발도 하는 것이다. 아빠가 곁에 없는 시간들을 견딜 수 없기에 엄마를 찾고, 엄마를 찾아가려는 계획을 들키자 아빠에게 같이 가 달라 요구한다. 아빠가 함께 가주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 부산으로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 아빠가 자기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름의 시험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다. 아빠는 충분히 마음으로 딸 수안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데 딸 수안이 그것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처음으로 좀비라는 재난을 통해 딸 수안은 아빠의 체온을 가장 오랫동안 느끼게 되었다. 무작정 자신을 안고 뛰는 아빠에게서 거친 심장박동과 함께 안도와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 자신은 지켜지고 있다. 때로 수안이 역시나 어린아이다운 섣부르고 철없는 행동을 보이는 이유도 그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어른이 되기에는 든든히 곁에서 지켜주는 아빠의 존재를 너무나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직 응석받이 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아빠의 존재를 그렇게 강하게 느끼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아빠를 잃게 된다고 생각해 보라. 아빠를 보내는 수안의 꺽꺽거리는 외침과 모든 것이 끝나고 울먹이는 노랫소리는 그같은 상실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그렇게 아빠는 마지막까지 수안을 지켜낼 수 있었다.


물론 우석은 매우 이기적인 인물이었다. 오로지 개인의 유불리와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인정머리 없는 말 그대로 개미핥기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처음부터 말했듯 우석은 아버지였다. 좀비로부터 도망쳐오는 상화와 성경을 보면서도 바로 문부터 닫아버리던 그때도 딸 수안을 끌어안은 채 필사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달리고 있었다. 딸과 자신의 안전을 위해 모두를 속였다. 딸을 먼저 보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은 위험을 감수했다. 우석이 상화, 영국들과 함께 좀비가 우글거리는 열차칸들을 뚫고 나가기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13호칸 화장실에 딸 수안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이타심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딸 수안을 구해야겠다는 부성에서 그는 그 위험을 무릅쓰며 사람들과 힘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연장에서 그에게 모두를 지키다 죽어간 상화의 아내 성경이라는 지켜야 할 한 사람이 더해진 것 뿐이었다.


실제 열차가 멈추고 함께 탈출했던 영국과 진희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전혀 그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예 그런 사람 따위 없었다는 양 오로지 곁에 있는 성경과 수안에게만 집중할 뿐이었다. 하긴 당시 상황에 생사를 모른다면 결과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상화가 자기에게 맡긴 그의 여자를 구한다.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자신의 소중한 아이를 지킨다. 마지막 순간 우석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래서 한없이 순수한 딸의 태어날 적 모습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저 오로지 딸과 자신만이 존재하는 가장 소중했던 순간의 기적이었다. 그것이 우석을 지금껏 싸우게 했고 지금 스스로 자신을 내던지게 만든다. 이타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냥 아버지이고 남자일 뿐이다.


영화가 신파라는 주자에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남자는 여자를 지켜야 한다. 남자라면 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여자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필 악역이랄 수 있는 천리마고속의 상무 용석(김의성 분)이 마지막 남긴 말 역시 여성인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서. 그래서 용석 역시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다. 자책하면서도 미안해하면서도 그러나 전혀 후회따위 없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저 앞만 보며 달려가려 한다. 우석과 용석은 그런 점에서 많이 닮았을 것이다. 차이라면 우석이 지켜야 하는 딸은 KTX에 함께 타고 있었고, 용석이 지키고자 했던 어머니는 목적지인 부산에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우석이 지켜야 하는 것은 지금 여기 자신의 곁에 있었고, 용석이 지켜야 하는 무엇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마지막 터널에서 성경과 수안이 좀비로 오인한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했다면 어땠을까? 작품성과는 별개로 내내 불편한 감정에 차마 다시 기억을 떠올리기도 괴로웠을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 가치도 없다. 남자의 희생이란. 남성의 싸움이란.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도 소중한 것도 그래서 흘려야 하는 눈물도 없이 건조한 현실만이 이어지기를. 그러나 1100만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보편의 감정이란 일부의 이기적인 냉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신파란 보편의 다른 이름이다. 모두가 같이 느끼는 것이기에 빈번히 흔하게 자주 쓰인다.


아이가 없어도 어느새 떠올리게 된다. 아주 어렸을 적 먼 기억속에서부터 아주 최근의 우연한 경험까지. 너무 보드랍고 연해서 차마 무섭기까지 하던 그 따뜻함을 기억한다.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이 기대어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는가. 좀비라는 극한상황을 통해 인간을 시험한다. 그들은 과연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한 눈에 보이는 저예산으로도 이만큼 압도적인 영상과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담아낸다. 조금은 촌스러울 정도로 구구절절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마저 어느새 잊게 만드는 압도적인 박력이 있었다. 잠시의 방심도 허락지 않는 긴장의 연속 속에 간절히 지키고자 했던 그 진심들이 스스로를 빠져들게 만든다.


타인이 되는가. 아니면 자신이 되는가. 얼마나 작품 안에 직접 들어가 느낄 수 있는가. 분노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처럼 자신 역시 이기적인 인간들에 분노하고 있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타인을 거부하는 이기와 이미 죽은 누군가를 위해서 모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기 가운데 무엇이 더 지독한가. 살고자 하는 추악함과 죽여야 하는 연민이 교차한다. 만일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다.




너무 늦게 본 탓에 기고는 아무래도 무리겠다. 그런데 덕분에 스포일러는 원없이 해 볼 수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얼마 안되었다면 이런 식의 리뷰는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볼 사람은 거의 다 본 뒤니까. 워낙 스포일러 없이 감상을 쓰기가 어려운 글쓰기 스타일인 관계로. 극장에서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물론 체력만 받쳐준다면. 극장에서 2시간 꼼짝않고 있을 체력이 없다.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