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항상 말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네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어느새 감동을 잃어간다. 감정이 메말라간다. 더이상 모든 것이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대수롭지 않다. 그것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부러라도 감동하려 항상 노력하는 이유다. 감동을 잃는 순간 어른은 꼰대가 되어 버린다
어른들을 움직이는 것은 감동같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진실이니 진심이니 하는 진부한 것들이 아니다. 감동이 사라진 빈 자리에는 현실만이 남게 된다. 손에 잡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것들만이 모든 이유를 대신하게 된다. 필요하거나 아니면 귀찮거나. 어른이 행동하는 이유다.
어른들이 있다. 확실히 강동주(유연석 분)든 윤서정(서현진 분)이든 도인범(양세종 분)이든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직 철모르는 아이들같다. 김사부(한석규 분)가 그것을 강동주에게 정면으로 지적해준다. 네가 아는 세상과 어른이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다른가를. 네 편 내 편이 없다. 무엇이 진실이고 진심인가도 상관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도 상관없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김사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의사로서 김사부 역시 때로 강동주와 윤서정 등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자기에게 당연한 것이 아직 어린 그들에게도 당연하다. 자기에게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은 그들에게도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매순간 놀랍고 신기해서 아이들은 겁도 없이 앞으로 달려갈 수 있다. 놀라고 당황하고 성가신 모든 순간들이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으로만 여겨진다.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아이들은 스스로 걷는 법을 배워간다. 인류의 문명은 그렇게 어른과 다른 길을 걸어가려 한 아이들에 의해 발전해오고 있었다.
더 크고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서. 더 가치있고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위해서.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자기가 지금 여기서 느끼고 있는 그 모든 감정들이 아닐까. 윤서정을 찾으려 서울까지 가서 첫눈을 맞으며 슬며시 윤서정의 손을 잡는다. 짐짓 핑계를 대고 그 손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알면서도 윤서정은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이 지금 이순간 그들에게는 전부다. 사람을 살리고 싶고, 살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이 순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매순간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그럼에도 그 한 가지만을 위해 꿋꿋이 버티며 일어선다.
환자를 위해 판단해야 하는 매순간 의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의사로서 환자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체념이고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환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자신 뿐이기에 의심하고 갈등하면서도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기에 끝끝내 혼자서 버티며 감당해야만 한다. 본원 외과장 송현철(장혁진 분)이 밀려드는 응급환자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도망치고 만다. 그런 식으로 견뎌왔을 것이다. 핑계를 대며, 이유를 만들어 붙이며, 애써 도망치고 숨으면서. 그러면서 어느새 자신마저 설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단지 아직 도망치는 법도 숨는 법도 배우지 못했기에 젊은 의사들은 더 큰 절망과 싸우면서도 끝끝내 버티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사부의 짐이 무겁다. 이들이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는 어른인 김사부의 세대에 달려 있다. 그들이 어떻게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는가에 따라 이들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이다. 윤서정의 PTSD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찾아온 의사가 김사부에게 스치듯 내뱉은 한 마디는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번에는 도윤완(최진호 분)에게 지지 말라. 김사부가 도윤완에게 지고 쫓겨나면서 병원은 도윤완의 것이 되고 말았다. 도윤완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하마트면 자신 역시 그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돌담병원과 젊은 의사들을 지키기 위해서 김사부는 도윤완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신회장(주현 분)과도 거래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본다. 과연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도윤완이 악의를 가지고 보낸 의사는 거꾸로 윤서정에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자신마저 속고 있었다. 죽음은 단지 속죄였다.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다. 진짜 죽고 싶은 사람에게 자살은 구원이며 해방이다. 솔직한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며 자신의 진실한 바람을 더듬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것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매순간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진실한 소망이었다. 자신은 의사이고자 한다. 그 생생한 실감이 그녀의 존재를 일깨운다. 자기가 서 있는 지금 여기, 그리고 자기 자신. 여기서 자신은 살아있다.
어떤 면에서 그동안 윤서정을 강하게 옭아매고 있던 족쇄 하나가 그로써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동주의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 강동주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기가 욕망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자기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의사가 되고 싶은 것처럼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와 사랑하고 싶다. 물론 그렇게까지 솔직해지려면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겠지만. 그렇게 쉽게 풀릴 것이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냥 혼자서 버티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지키며 싸워야 한다. 이미 어른의 세계를 안다. 자신 역시 그들과 같은 어른이다. 아무렇지 않게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짓밟을 수 있는. 어른 김사부가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김사부가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대다. 때로 타협하며 때로 싸운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김사부가 화내기 전에 먼저 간호사 박은탁(김민재 분)이 감사실 직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만다. 모두를 위한 싸움이고 단지 자신만이 어른일 뿐이다. 어른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어른의 몫이다.
우연화(서은수 분)의 정체는 너무나 큰 반전이었다. 역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순진한 눈망울로 강동주만을 바라보던 그 순박한 처녀가 사실은 상당히 놀라운 실력을 갖춘 관계자였다. 의사인가는 모르겠다. 중국인인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이것이 장차 김사부와 강동주에게 어떤 변수로 다가오게 될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비밀이 많다. 감춰진 것이 많다.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 세상엔 이런 놀라운 우연이 하나쯤 있어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돌담병원을 중심으로 가쁘게 돌고 있는 폭풍에 또 하나 변수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단순하다. 아이들이 소망하고 소원하는 것도 그래서 매우 단순하다. 그래서 더 진실하다. 아무것도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롯하게 올곧게 바라는 그것이야 말로 순수라 불리는 것인지 모른다. 영악하지만 순진하다. 제법 똑똑한 척 하지만 아직 어리기만 하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김사부와 강동주를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에 구원 같은 건 없다. 투쟁만이 있다. 오로지 자기의 실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들만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싸워야 하는 이유 역시 그런 순백한 무지와 순수 때문이 아닐까.
돌담병원에서 응급수술을 시작하려는 순간 서울로 돌아가는 강동주의 앞에 연쇄추돌사고현장이 나타난다. 의학드라마로서의 긴박함도 놓치지 않는다. 역시 모든 갈등을 해결할 열쇠는 그들의 직업인 의사에 있다. 그곳은 현장이다. 프로는 오로지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들을 위한 위기다. 그들을 위한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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