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깨비 - 삶과 죽음, 필멸과 불멸, 환상과 진실, 그러나 오롯한 하나!

까칠부 2016. 12. 11. 04:17

도깨비가 도깨비인 이유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물異物이기 때문이다.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소녀는 죽음 속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죽었어야 하지만 살아났다.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지만 태어났다. 없어야 하는 이름을 가지면서 소녀의 운명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저승에도 명부가 없다. 살아있지만 죽음의 예정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소녀는 살아있는 것일까.


사랑은 영원을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 끝날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멸의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할 불멸의 사랑을 꿈꾸며 가지고 싶어한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진실한 사랑을 하고 있다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이 죽음의 이유가 된다. 불멸이어야 할 사랑이 필멸의 이유가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삶을 꿈꾼다.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만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또 누릴 수 있기를. 하지만 정작 불멸의 삶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이겠는가? 저주이겠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거의 천 년 가까운 시간을 살았으면서도 정작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앞에 나타나자 도깨비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불안과 두려움에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은 과연 죽고 싶은 것인가? 살고 싶은 것인가?


아니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살고 죽는 것은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불멸이든 필멸이든 단지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무엇이 나를 기쁘게하고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이 진정 나를 살아있게 하는가. 그냥 숨만 쉬고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느낀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다. 내가 나여야 하는 이유다. 찰라가 영원이 되고 영원이 찰라가 되는 순간 진정한 불멸을 얻는다. 단 한 순간을 살아도 그것은 영원일 수 있다.


그냥 사랑드라마다. 그냥 사랑하는 드라마다. 더 절실하고 간절하게 사랑하는 드라마다. 어떻게도 만나 사람은 사랑을 한다. 어떤 조건에도 만나 사람은 사랑을 한다. 어떤 운명에도 만나 사람은 사랑을 한다. 천 년의 시간을 넘어서 사람은 사랑을 한다. 삶과 죽음마저 뛰어넘어 사람은 사랑을 한다. 사랑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지만 자신만을 위한 단 하나의 사랑이다.


전통의 도깨비의 전설과 신화적인 상상력을 로맨스와 적절히 버무린다. 여우상이다. 철모르는 소녀면서 삶과 사랑을 아는 성숙한 여인이다. 김고은이어야 했다. 너무 대놓고 어려서도, 그렇다고 티나게 성숙해서도 곤란하다. 막 사랑을 알게 된 순간, 사랑을 통해 소녀에서 여성으로 깨어나는 딱 그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찰라가 영원이 되듯 영원이 찰라가 되듯.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세상에 지쳤으면서도 여전히 철업고 물색모르는 수다들이 그녀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들을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낯설고 신선하면서 한 편으로 불편하고 그런데 우습고 즐겁다. 안타깝게도 벌써 딱 조카 또래라는 게 나로서는 서글프기만 하다.


한참 나이차이가 나는데도 전혀 이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다. 어차피 시간을 초월해 있다. 39살과 19살이라면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939살쯤 되면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느낌이다. 여전히 소녀는 철모르고 남자 역시 철이 없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숙명일까. 어쩌면 뻔하고 상투적인 대화지만 캐릭터가 캐릭터다 보니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공유가 새롭다. 김고은도 새롭다. 한 편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게 달달한 향기같은 것이 난다. 질투조차 나지 않는 흐뭇한 달콤함 같은 것이다. 이대로 그들이 행복해져도 좋지 않을까. 이토록 순수하고 서로에게 절실하다면.


저승사자와 동거한다. 죽지 못한 도깨비와 죽음을 거둬가는 저승사자가 같은 집에서 함께 산다. 대략 예상되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냥 나중의 즐거움을 위헤 한 쪽에 치워둔다. 다분히 여성시청자를 배려한 설정이다. 잘생긴 남자 둘이 형제인 듯 친구인 듯 원수인 듯 아웅다웅하며 어울린다. 의외로 되바라지고 오지랖넓은 유덕화(육성재 분)의 존재는 심심하지 말라는 양념이다. 관찰자이면서 해설자다. 시청자가 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와도 같다. 그나마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공유와 특히 김고은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매력만으로 보는 가치가 있다. 삶과 죽음, 영원과 불멸이라는 경계를 보여주는 그들의 설정과 배경과 대사들도 흥미가 있다. 무엇보다 비극을 품었으면서도 해맑을 수 있는 그 힘에 감탄하게 된다. 사랑은 어찌되었든 사랑할 수 있기에 행복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소녀는 죽음에서 태어났다. 남자는 죽음에서 영원을 얻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 필멸과 불멸 사이에 있다. 진실과 허구 사이에 있다. 그러나 단 하나 오롯한 한 가지가 남았다. 그래서 사랑이야기다.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