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 역시 일본의 만화창작그룹 클램프의 팬이었다. 워낙 '성전'의 인상이 강했다. 그리고 X의 시작부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림도 잘 그리고, 캐릭터도 예쁘고, 적당히 미친 듯한 연출과 스토리도 좋았던 데다가, 무엇보다 상당히 허세스런 설정과 대사들이 완전히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워낙 열등감에 찌들어 살던 어린 청춘이라 그런 열등감을 제대로 저격하는 허세스런 내용들이 당시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것은 여전한 편이다.
하지만 아마 계기가 '레이어스'의 코믹스판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만화책을 보다가 졸았다. 클램프의 작품이고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나와 있어 기대를 가지고 구해서 보았는데 첫 권을 반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졸고 말았다. 내가 어지간해서는 만화책 보면서 졸지 않는다. 그렇기는 커녕 아예 지금까지 만화책 보면서 존 적이 그때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보았던 '20면상에게 부탁해'는 클램프라는 창작집단에 대해 어떤 의구심같은 것을 가지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여자들 뭐하는 여자들이지?
'성전'의 엔딩을 보고 막나가는 'X'의 전개들을 보고,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작품들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이 여자들은 그냥 '오타쿠'였구나. 바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허세스런 설정과 대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적나라한 증거들이었던 셈이다.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도저히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 상상만으로 만든 인공의 구조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실에 있을 법한 허구의 실제가 아닌 단지 자신들의 관념을 만족시키는 의도된 허구 - 즉 망상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의 관념에 동조하는 동안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바로 파탄이 일어난다.
'마법기사 레이아스'를 읽으면서 졸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도무지 현실의 캐릭터들 같지 않으니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에도 공감하기 힘들다. 무언가 굉장히 심각하거나 아니면 우스운데 마치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 양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거기서 그런 말들을 하고 그런 행동들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마저도 너무나 완벽하게 완결되는 구조가 이곳은 확실히 누구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세계구나. 그리고 그때부터 클램프의 만화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클램프의 만화에서 모든 요소들은 클램프의 만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의도가 충돌한다. 자신의 의지로 클램프의 만화를 본다.
그리고 보게 된 만화가 바로 지금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사쿠라'다. 우리나라에서는 '카드캡터 채리'라는 제목으로 SBS에서 방영한 바 있다. 한 마디로 동인물의 총화라 할 수 있었다. 원래 클램프 자체가 동인출신이기도 했다. 동인들이 좋아할만한 설정이 모두 망라되었다. 동성애와 유아성애, 근친애, 기타등등등등... 주인공 사쿠라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인간이 없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거 도대체 뭐하는 애니메이션인가. 그런 점에서 초등학생이 주인공이지만 정작 가장 열광하며 본 것은 나이먹은 오타쿠들이었다. 일일이 설정이며 구체적인 내용들 파고들어가면 이건 진짜 아이들 보여줄 작품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만들면 좋아할 것 같으니까. 그 안에 정작 클램프는 없다. 클램프라는 인간은 없다. 관념만 남아 의도를 가지고 허구의 세계를 구축한다. 하라 히데노리를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무언가 현실을 그리는 것 같은데 하나같이 관념에 갇혀 있다. 작가의 의도가 인물들과 설정을 말처럼 움직인다. 도무지 작품에 이입하며 보기가 쉽지 않다.
바로 그게 문제다.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먼저 작품에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작품의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작품속 인물들이 자신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인물들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럴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철저히 관찰자로서 작품속에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지켜보게만 만든다. 작가들부터가 원래 그런 의도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문득 생각났다. 주제가는 참 좋다. 소녀적이면서도 성인도 충분히 공감할만한 풋풋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멜로디도 쉽고 가사도 매우 간결하고, 그런데 애니메이션 자체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끝까지 다 보지도 못했다. 원작 만화는 말할 것도 없다. 클램프의 만화 가운데 끝까지 본 것은 단 하나 '성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자신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오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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