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송골매 - 하늘나라 우리님

까칠부 2017. 3. 15. 02:18



벗님들의 이치현도 가끔 방송에 나와 당시 자기들은 프로였음에도 아마추어 취급을 받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는데, 사실 그대로였다. 밤무대에 서려면 손님들이 원하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어야 했다. 트로트를 원하면 트로트를 연주하고 블루스를 듣고자 하면 블루스를 들려주고 디스코를 부르라면 디스코를 부른다. 당연히 그러려면 연주력이 뛰어나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캠퍼스 밴드들은 그것이 안되었다. 구창모가 중간에 송골매를 나가야 했던 이유였다.


아마 집안사정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 같다. 돈이 필요했는데 당시 송골매로는 돈을 벌 수 없었다고. 들국화가 해체된 이유도 결국은 돈이었다. 음반도 수십만장이나 팔리고 공연도 매번 매진이었는데 정작 손에 쥐어지는 돈이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어차피 당시 관행이라는 게 음반이 팔린다고 인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밴드가 공연할만한 공간에서는 티켓판매만으로는 충분한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티켓값을 올려받았다가는 어차피 돈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일텐데 관객만 줄어들 뿐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밴드들의 공연은 좁은 공간에서, 소수의 관객만을 상대로, 그나마 티겟값도 최소한의 가격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벌려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하려고 돈을 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80년대까지 밴드를 만들어도 정작 오래 가는 경우란 매우 드물었다. 말이 부활 13집이지 80년대 부활멤버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를 한 번 보라. 시나위 역시 4장의 앨범을 내는 동안 신대철 말고는 매번 멤버가 바뀌었을 정도였다. 형제들로 이루어진 산울림도 결국 돈이 안되어서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이다. 송골매라는 이름으로 거의 멤버교체 없이 4집까지 만들고 구창모가 탈퇴하고 나서도 배철수를 중심으로 9집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오죽하면 한국밴드의 한계는 10집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었겠는가. 10집 넘어가는 밴드는 한국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송골매가 그렇게 오래 - 더구나 밴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보컬 구창모가 탈퇴하고 난 뒤로도 다른 밴드들과 달리 9집까지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역시 부활과 시나위의 경우와도 같았다. 밴드의 멤버들이야 수도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반복하지만 단 한 사람 확실한 중심이 있어 밴드의 정체성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구창모가 미남보컬로서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때에도 배철수 역시 자주 미디어에 노출되며 독특한 외모와 캐릭터로 만만치 않은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예 구창모가 보컬이던 시절에도 보컬까지 나누어 맡고 있었다. 아마 부활 초기에 김태원이 이승철과 보컬을 나누려 했던 것도 그를 모방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다만 김태원은 배철수와 달리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던 탓에 인지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었다.


어쩌면 구창모가 탈퇴한 바로 그 무렵 배철수가 여전히 송골매의 리더로써 솔로음반을 내놓은 것도 그를 고려한 포석이었는지 모르겠다. 밴드의 얼굴이던 구창모가 나갔다. 구창모를 쫓아왔던 팬들이 구창모와 함께 모두 떠날 위기에 놓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송골매의 얼굴은 배청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구창모를 대신한 밴드의 얼굴로써 데몬스트레이션이었다 할 수 있을 텐데, 덕분에 솔로앨범의 성공으로 구창모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의 기존팬들과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모두 배철수를 보고 모여든 팬들일 것이었다. 그렇게 전만은 못해도 상당한 히트를 기록하며 송골매의 건재를 과시했던 것이 구창모가 나가고 바로 나온 이 앨범 송골매 5집이었다. 나도 꽤 좋아해서 당시 어디서나 즐겨 따라부르던 것을 기억한다. 아직 송골매는 죽지 않았다.


한국 밴드역사에서 기복없이 꾸준히 오래간 밴드들의 한결같은 특징이었다. 첫째는 리더가 보컬이거나, 아니면 보컬이 솔로로 데뷔할만 실력과 매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보컬 자신이 밴드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밴드에 계속 남아있거나. 한 마디로 보컬이 떠나면 망한다.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있던 보컬이 사라지면 밴드 역시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까 보컬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밴드의 운명이 결정된다. 최성원이 나갔어도 전인권이 남아있으면 여전히 들국화인 것과 같다. 하지만 전인권 없이 최성원 혼자인 들국화는 아무래도 대중의 입장에서 낯설게 다가온다. 그래서 성공한 것이다. 구창모와 인기를 나누었고 구창모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얼굴로써. 그리고 당시의 배철수의 인기는 이후 라디오진행자로서 그가 성공을 거두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단은 최고의 밴드에서 리더를 맡았다는 신뢰다. 음악에 대한 해박하고 깊이있는 지식과 이해는 그에 따라오는 것이다.


아무튼 당시 송골매가 얼마나 돈을 못 벌었냐면 구창모가 솔로로 데뷔해서 히트하니까 그동안 벌었던 돈의 몇 배나 되는 돈이 한 번에 보너스라는 이름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많은 밴드의 보컬들이 솔로데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머리를 깎고 방송에 출연했던 것이었다. 밴드는 돈을 못번다. 록으로는 돈을 못번다. 그리고 그렇게 솔로로 데뷔하면 배신자취급을 받고는 했었다. 얼마전 노라조 활동을 끝낸 이혁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신대철은 아예 면전에서 임재범에게 돈 많이 버니 좋냐고 따져물었다고 하고.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워낙 그렇게 깨져나간 팀들이 많았다 보니. 이승철이 솔로로 데뷔한 것을 보고 부활은 이제 끝이라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새롭게 송골매의 얼굴이 된 배철수가 솔로로 활동을 이어갈만한 정도의 가창력은 가지지 못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역시 앞서 언급한 조건의 두번째에 해당한다. 솔로로 데뷔해서 히트는 했어도 그것은 아직 송골매의 리더로서였다.


그야말로 80년대 한국밴드의 현실을 그대로 모두 담아낸 듯한 송골매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만큼 가장 인기있었고 그리고 당시까지 가장 오래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송골매보다 더 오래 인기를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런 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것은 모든 밴드가 겪었던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았고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맞을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배철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더가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중심을 지킬 때 밴드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역사 가사 자체는 매우 우울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 송골매의 처지처럼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죽은 연인을 저승까지 찾아가 만나려 한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하늘까지 찾아가 반드시 사랑하는 이를 만나려 한다. 당시의 시대상과도 닿아 있다. 어떤 절망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굽히지 않을 당시 젊은이들의 의지이기도 했었다. 하필 이 노래가 나왔을 때가 85년이었다. 군사독재의 막바지였다. 구성지지만 흥겨운 국악의 멜로디와 리듬은 신명 그 자체를 들려준다. 슬픔을 이기는 인간의 의지와 용기가 바로 신명인 것이다.


요즘 또 갑자기 송골매에 빠져들었다. 쓸데없이 지난 음반들을 모두 찾아듣고 있다. 노래와 함께 당시의 시대도 들리고 있다. 70년대의 고도성장을 거치며 고취된 민족의식이 밴드들로 하여금 전통음악을 찾도록 만들었다. 원래 황주로 시절 가요제에서 발표했던 노래가 바로 그런 연장에 있는 '세상만사'였다. 포크와 록과 국악과 고고, 그리고 때로 청승맞은 분위기까지. 연주력과 별개로 리프는 상당히 독창적이고 인상적이다. 당시는 그 연주력 때문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시간이 흘러도 좋다. 기억속에서만일지 몰라도.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