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알쓸신잡 - 수많은 이야기들, 듣고 알아가는 즐거움

까칠부 2017. 7. 15. 04:46

한 가지 정정하자면 뇌파로 로봇을 조종하는 방식을 처음 선보인 것은 역시 일본 만화영화인 '투장 다이모스'였다. 하필 '투장 다이모스'에서도 주인공이 로봇을 통해 가라데를 구사하며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장 다이모스'의 메카닉과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 만든 것이 80년대 극장에서 상영했던 '선더A'였었다. 


일본 정도로 확실한 시장이 있고 자본과 기술이 고도로 집약된 환경에서도 독자적으로 하나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해서 성공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괜히 야심차게 막대한 자본을 들여 기획한 작품이 실패하면 그대로 제작사는 문을 닫는 것이다. 하물며 80년대까지 한국사회는 아직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과 비교할만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기반 자체가 없었다. 하청을 하면서 동화를 그릴 인력은 많았지만 정작 필요한 기획과 연출, 디자인을 담당할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돈도 없는데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부터 하나씩 만들어간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던 90년대에도 독자적으로 기획한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흥행이 실패하며 잠시 일었던 애니메이션 붐은 흔적도 없이 꺼져버린 상태다. 어쩔 수 없이 80년대 한국 만화영화를 이야기하려면 그보다 앞선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일본 만화영화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80년대 없는 살림에 부모님 졸라서 극장에 내걸린 모든 한국 만화영화를 찾아보았던 어린이의 슬픈 소회다.


유시민이 고행석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마 이 블로그에 썼었던가? 아니면 다른 어느 게시판이었던가? 고행석을 찰리 채플린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공장에서 이름만 빌려 쏟아져 나온 만화들이 아닌 아직 고행석 자신의 의지가 더 많이 반영된 초기작의 경우 진짜 페이소스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시민이 예로 든 탁구만화에서도 고작 13평 아파트 때문에 회사 사장에게 몸을 파는 여직원으로 여주인공 박은하가 등장한다. 바로 그 13평 아파트 때문에 사장의 지시로 상대팀 선수인 구영탄을 유혹하기도 한다. 하긴 당시 성인만화잡지의 분위기가 거의 그랬었다. 한창 민주화의 거센 물결이 사회 각분야로 퍼져가던 시절이라 연재만화들조차 그런 계급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고행석은 그 전부터도 괜히 없는 사람들의 가슴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유머를 곧잘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부유해도 고행석의 주인공들은 가난했고 주위에는 항상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고단한 현실에 짓눌리지 않으며 모든 것을 웃음으로 승화하려는 힘이 있었다. 초기작의 경우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보지 않은 것 같다.


학교를 강원도에서 다녀서 특히 막국수가 익숙하다. 서울 와서 막국수 먹고 놀란 점 중 하나다. 막국수가 냉면같다. 막국수의 맛은 뚝뚝 끊기는 거칠고 구수한 메밀의 향에 있을 텐데. 막국수를 저렇게 바로 내려서 끓는 물에 데쳐 내놓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메밀만으로 면을 만들면 글루텐이 부족해서 면의 형태를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예 반죽으로 면의 형태를 만들고 바로 끓는 물에 삶아 고정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면의 특성상 오래 삶으면 면 자체가 면수에 녹아나오고 만다. 글루텐으로 고정되는 밀가루면은 조금 오래 삶아도 퍼지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면수에 녹아버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또 메밀면을 쓰는 곳에서는 면수를 마치 육수나 차처럼 함께 곁들여 내놓기도 한다. 조금 슴슴한 김치국물에 말아먹으면 그 맛이 꿀맛. 참고로 내가 자주 먹은 곳은 백김치국물에 면을 말아 내주고 했었다.


그러고보면 어째서 고등어구이를 고갈비라 부르는지 무척 궁금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고갈비라는 말 자체도 거의 들을 일이 사라지마 완전히 잊고 있었다. 확실히 고등어를 먹었어도 기분은 갈비를 먹어야 한다. 닭고기를 먹었어도 역시 기분은 갈비여야만 한다. 참고로 나같은 경우 바로 저 이름때문에 닭갈비를 아주 늦은 나이까지 거의 먹지 않았었다. 하필 삼국지를 읽었던 탓에. 삼국지에 닭갈비를 가리키는 한자어인 계륵이 나온다. 버리기는 아깝고 먹으려니 먹을 것이 없다. 회사 다니면서는 주위에 그나마 먹을 만한 곳에 닭갈비집밖에 없었던 탓에 허구헌날 거기서 회식하느라 지금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다. 역시 음식과 관련한 기억이 가장 직접적이다. 볶음밤은 원래는 어느 고기집에서 단골들에게만 서비스로 해주던 것이 어느새 90년대부터 일반화되었다고. 닭갈비 볶음밥도 그리 오랜 문화는 아닐 터다.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정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정재승 박사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토론과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른 점을 알고 공통된 합의점을 찾아간다. 하지만 원래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바로 다원주의 사회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그 다원화된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과 같아지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와 같아지는가? 그도 아니면 그냥 서로 다른 채로 대충 납득하고 합의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것인가? 그러니까 이 점에서 내가 다르고 네가 다르다. 그리고 서로 같아질 방법도 없다. 그러면 적당히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으며 합의점을 찾아간다. 정치는 그래서 거래다. 따라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거래를 위해 흥정이 필요한 것이다. 흥정의 다른 말은 말싸움이다. 내가 더 갖고 네가 덜 갖도록 하는 것. 그러라고 있는 것이 정치인 것이고. 그들은 원래 다르기 위해 정당에 몸담은 것이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 들려주는 80년대 대학가의 풍경이 지나간 좋아진 세월들을 새삼 실감케 한다. 하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당시 중고등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국민학교라고 달랐을까? 딱 지금 인터넷문화 그대로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튀어나오면 잘라내고, 모자르면 잡아늘이고, 그렇게 딱 맞춰진 말 잘듣는 규격품만을 양산하려 했었다. 하긴 그런 것이 근대의 교육이기는 하다.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단지 국가권력이 보기에 안좋다는 이유만으로 의심과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참혹하던 시대였지만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도 그들만의 십자가는 있을 것이다. 황교익의 자못 서운하다는 듯한 표현에 대한 답으로 매우 적절했었다.


어떤 식으로 토론을 할 것인가? 어떤 자세로 토론에 임하는가? 유시민이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던 이유였다. 그나마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추미애가 있다. 무려 당대표인 추미애가 직접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야당을 직접 겨냥하며 이슈의 중심에 서고 있다. 당시 참여정부에서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유시민밖에 없었다. 첨예한 사안에 대해 참여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며 날선 논쟁을 벌여야만 했었다. 옳은 말을 해도 싸가지가 없다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시민이 어떤 마음으로 토론에 임하고 있었는가를 이제야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선봉장이다. 자기가 지나간 길로 지지자들이 따라 진격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길을 만들어야 지지자들도 뒤따라온다. 그러니 자기 정치는 실패할 밖에. 그러면서 너무 많은 적을 만든 탓에 정치적 외연에 한계가 너무 분명했었다. 문재인이나 안희정처럼 오히려 이슈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면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 물러난 뒤의 모습이 지금의 유시민이다.


새벽에 갓받아든 신문에서 나던 쨍한 잉크냄새는 나 역시 기억한다. 신문만이 아니다. 아니 새책만도 아니다. 헌책에는 헌책만의 냄새가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더 좋아했었다. 적당히 종이가 습기를 머금고 산화되며 만드는 그 냄새는 아침에 낙엽태우는 냄새 그 이상이었다. 다만 김영하 작가도 동의하는 것처럼 그것도 그 쨍한 잉크냄새가 함께 있어야 그 맛을 낼 수 있다. 어떻게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일자리를만들어 왔는가. 기술의 수명과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의 상관관계까지. 바로 몇 년 전 필요하다고 배운 기술이 지금은 의미없이 경력과 무관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서게 만들고 있다.


그냥 수다다. 아무 맥락없이 늘어놓는 말의 나열들이다. 춘천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 한 번 가봤던가? 아무 연관없는 일상과도 그렇게 허투루 이어지는 대화들로 함께 공유된다. 대상의 이름을 안다. 대상에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이란 원래 존재다. 아마 만화 '몬스터'의 주제가 바로 그것일 터다. 이름이 바뀌면 존재까지 바뀌는가? 이름이 바뀌어도 존재는 여전히 그대로인가?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작가란 그 대상에 역할을 부여해야 하는 존재다. 어느것 하나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벌써 다음주면 마지막회다. 이렇게나 즐거웠는데. 그렇게 쓸데없이 리뷰를 빙자한 수다를 늘어놓을만한 프로그램은 또 없을 터인데. 혹은 내가 아는 것과 혹은 내가 모르는 것과 혹은 무심코 지나쳤던 이야기들이 성찬을 이룬다. 무언가를 듣고 알아가는 과정이 이토록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다. 시간이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