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명불허전 - 마지막 숙제, 때로 냉혹하고 잔인한 신념과 양심을 위해

까칠부 2017. 9. 25. 07:46

원래 정의란 잔인한 것이다. 신념과 양심이란 때로 냉혹하고 단호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흔한 변명인지 모른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혹은 곤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딸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 병든 딸을 살리자고 다른 사람의 딸을 죽였다. 그 사실을 딸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딸을 살릴 방법이 영영 없게 된다. 인간의 가장 오랜 딜레마 가운데 하나다. 역사상 수많은 비극들이 그런 모순 속에서 탄생했다. 정의와 인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보편의 신념과 인간의 양심, 그리고 개인의 인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무엇을 선택해도 후회는 남는다. 딸은 살았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에 딸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그 가운데 어떤 후회가 자신에게 그나마 더 가치있을 것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딸을 위해 사람을 죽여야 했던 만큼 그 결과 살아난 딸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후회와 원망까지 더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드라마에서는 고작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되는 것 뿐이었다. 살아있다면 그래도 후회는 덜할 것 아닌가.


하늘은 속여도 자기는 속일 수 없다. 세상 모두를 속여도 자기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저지를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었다. 그렇게 때로 완전히 자기를 속이고 그 사실을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 거짓말로 자신을 속여야만 했던 죄와 악이 어느 순간 실제가 되고 진실이 되어 버린다. 그런 것은 너무 당연하다. 어느새 그 자체가 정의가 되고 신념이 되고 양심이 되고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항상 모든 일에는 처음이 중요하다. 지금 딛는 단지 한 걸음이 어쩌면 나머지 전부가 될 수도 있다.


침이 아니었다. 침이 신통력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임(김남길 분) 자신이었다. 자신의 후회, 자신의 망설임, 자신의 두려움, 무엇보다 그것이 죄이고 악이라는 양심의 분노다. 그런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환멸과 모멸이다. 그래서 최천술(윤주상 분)도 그리 다급하게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후회와 분노를 속이고, 그런 자신을 향한 환멸과 모멸마저 받아들였을 때 그는 더이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마는 것이다. 아직은 남아 있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의사로서의 양심을 외면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영영 다시 그것을 되찾지 못할 수 있다. 그 경계에서 그는 침의 경고로 자신의 길을 지킬 수 있었다.


과거 허준(엄효섭 분)이 마성태(김명곤 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최천술을 구하기 위해 마성태를 돕지 않았던 것은 의원 최천술을 위한 것이었다. 설사 잠시 죄인이 되어 곤란을 겪더라도 여전히 의사로서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법적으로는 죄인이 되었지만 타의에 의해서도 한 번도 의원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적이 없다. 의사로서의 신념을 잠시도 포기했던 적이 없다. 유치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최천술은 의사였다. 마성태는 이미 의사가 아니었다. 진정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앞서 예로 든 딸의 경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예가 다르다 하겠다. 후회하더라도 미워하고 원망하더라도 역시 살아있는 게 그 어느것보다 소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죽는 사람 없이 화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악역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할 수 있는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돋보인다. 그런 유재하(유민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의사'라는 단어가. 출세만을 쫓는 것 같던 최연경(김아중 분)의 동기 강만수(이재원 분)도 자기 입으로 자기도 의사라 말하고 있었다. 어떤 너무나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냥 자신을 의사라 여기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너무나 당연한 의사라는 한 마디가 그 의미를 더 깊게 넓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꾸짖는다. 이제 갓 공부를 마친 애송이 의사가 수십년 의사의 길을 걸어온 병원장을 다그친다. 의사의 길에는 선배도 후배도 없다. 할아버지도 손자도 없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흔히 쓰이던 말이 있었다. 동도라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다. 단지 조금 앞에 조금 뒤에 그렇게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토록 허임과 최연경을 번거롭게 성가시게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를 위한 장치였을까.


그리고 결국 모든 위기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그동안 의사로서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켜 온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를 고마워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행동이 아직은 남아있던 위기로부터 최천술을 구해준다. 결국은 인정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직장도 잃고 경제적으로 곤란해진 아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아들에 대한 부정이 그동안 자신을 도와주었던 은혜를 대신한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지만 약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너무 많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양심을, 그 근본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쉽고 사람들의 믿음과 기대도 배신하지 않는 평범하지만 바람직한 결말이다.


아무튼 보고 있으면 정작 한의사가 주인공 중 하나지만 한의학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작가가 드라마를 썼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양의사 가운데 수 십, 혹은 수 백 년 전 이름을 날린 명의가 현대로 넘어와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임진왜란부터 현대까지 무려 600년이라는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한의학은 전혀 조금도 발전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수백년 전 조선의 의원이 종횡무진할 정도로 침구술이 퇴보한 듯 보인다. 현대의학은 불과 10년 전과도 너무나 크게 많이 달라져 있는데 한의학은 수백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아진 것이 전혀 아무것도 없다. 동의보감이 편찬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데 그 허준조차 현대에서 명의소리를 들을 정도다. 드라마기는 하지만 어쩌면 한의학에 대한 비판에 있어 가장 뼈아픈 부분이 아닐까. 과연 의식하고 그처럼 묘사했던 것이었을까.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자신이 과거에 놓아두고 온 것들을.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하는 것들을. 그렇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조선으로 돌아간다. 전란중인 조선으로 살리지 못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돌아간다. 살려야 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혼자서 다시 돌아간다. 돌아올 수 있을까? 어느새 돌아온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 조선시대 사람인데도 현대와 더 밀접하게 - 하긴 제작의 편의를 위해서도 조선보다는 현대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연했을 것이다.


마지막 숙제를 풀었다. 침통의 비밀이 밝혀졌다. 자신이 어째서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로 오게 되었는가. 그리고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의원으로서의 혼란과 고민에 대해서도. 최천술의 병이 남는다. 그리고 최연경이 남는다. 풀어야 할 매듭을 풀기 위해 그는 돌아간다. 새로운 위기가 시작된다.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