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흑기사 - 악녀, 착하지 않은 여자들

까칠부 2017. 12. 22. 10:16

물론 못되기는 했다. 아무리 노비라고, 더구나 직접 자기 손으로 사람 얼굴을 인두로 지지는게 말이 되는가. 하긴 그래서일 것이다. 착한 여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하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원래 착한 여자가 아니었으니 굳이 그런 것들에 구애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인데, 아니 인간인데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질투조차 않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다만 남들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에 반해 샤론(서지혜 분)은 실제 죽이려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백희(장미희 분)의 사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려졌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을 쫓아내고 새로 들인 여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몰래 찾아가서 안아보기까지 했으니 자신이 겪은 설움과 원망이 더 선명하게 들끓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도 해치거나 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단지 신분이 바뀐 분이(신세경 분)가 노비가 아니었고 노비라는 이유로 학대받지만 않았다면 그냥 자라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물론 아이가 바뀐 부모나 부모가 바뀐 아이들 모두에게 차마 못할 짓이었지만 당시 장백희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먹은 것도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착하지 못해서였다. 착하지 않아서였다. 못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에 반항했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실제 악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분이는 그저 착하기만 한 여자였는가? 착한 노비라면 감히 자신의 주인인 아씨마님의 남자를 마음에 품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의 남자로 만들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샤론이 겪은 고통들은 어쩌면 분이의 저주에 의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했고,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로 죽지도 못하고 수백년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에 비하면 문수호(김래원 분)라는 남자는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양반인 자신은 얼마든지 노비를 첩으로 거둘 수 있고, 첩이 아니더라도 가까이 두고 마음을 줄 수도 있다. 본처인 아내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문수호의 캐릭터가 평면적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그냥 착한 남자였다. 좋은 남자였다. 아무 악의없이 그저 멋지기만 한 남자였다. 마음에 그늘이 없다. 돈까지 많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악역이랄 수 있는 박철민(김병옥 분)조차 여전히 자신이 만든 그림자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 선악을 넘어서 오로지 돈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긴다.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마저 아무 가치없이 대하고 있다. 다만 그림자가 너무 짙다 보니 그림자에 짓눌려 그 역시 악역으로써 평면이 되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과 존재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후회하면서 행동해 왔던 분이와 샤론에 비해 과거의 문수호는 과연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겼던 것일까.


그래도 주인공이니까 문수호를 위한 몫도 준비되어 있다. 박철민이 어쩌면 문수호의 아버지가 죽은 화재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정해라(신세경 분)의 부모가 죽고 하루아침에 빈털털이가 된 과정을 박철민이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원래 자기의 것을 허무하게 빼앗기고도 모른 채 넘어가지 않는다. 진실을 알고 자기 것을 찾는 과정이 샤론과 정해라 두 여자의 생을 넘은 사랑이와 엇갈린다. 샤론이 정해라가 된다. 자신을 거부하는 전생의 남편 문수호를 되찾기 위해서. 참 질긴 싸움이다.


안타깝게도 역시 드라마는 배우 김래원을 위해 썩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캐릭터가 평면적인데다 그다지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문수호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아닌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매력이다. 서지혜도 예쁘지만 샤론도 매력적이고, 평소의 신세경보다 정해라가 때로 놀랄 정도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도 워낙 김래원은 잘생겼으니까. 남자로서 매력적이니까. 보는 즐거움이 있다. TV는 역시 보는 것이다. 눈이 행복하다. 의도한 것이라면 과연 탁월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