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문득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까칠부 2018. 1. 14. 11:17

그러니까 1975년 대마초파동 이후 언더그러운드에서 메이저로 올라오는 통로 자체가 아예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클럽무대 자체가 초토화되었다. 클럽무대에서 해외의 음악을 카피하며 선진음악을 익혀왔던 다수 프로음악인들이 더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소울을 하던 사람도 록을 하던 사람도 죄다 트로트를 하며 주류음악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때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준 것이 바로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다.


지금 찾아들어봐도 하나하나가 놀랄 정도로 참신한 개성과 완성도를 보여준다. 장르 또한 다양하다. 무엇보다 20대 대학생들 자신이 즐기는 음악이다. 그렇게 가요제는 80년대까지 이미 하나의 장르로써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요제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가요제 하는 날이면 대부분 20대 이하에서는 TV앞에 앉아서 올해는 어떤 히트곡과 스타가 나올까 지켜보고 있었고 젊은 감각이 선사하는 새로운 음악을 바로 다음날 학교에서 따라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그런 사회의 경직성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굳이 가요제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지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0대를 겨냥하여 김승진, 박혜성, 김완선, 이지연 등 10대의 나이에 데뷔하는 가수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주류음악에도 밀려들면서 더 다양한 장르와 표현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방차와 박남정의 댄스음악에 젊은 층은 열광하고, 부활, 시나위, 백두산을 필두로 록그룹들도 젊은 대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확실히 이들에 비해 가요제 출신 가수들은 아마추어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 아마추어였다. 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이들 가운데 실제 이후로도 음악활동을 이어간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곡 자체는 참신했지만 가창력이나 연주력, 음악적인 이해나 역량 모두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에 비해 새롭게 등장한 젊은대중들의 스타들은 많은 부분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그 차이는 심각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서태지의 등장이었다. 서태지보다 더한 파격은 대학가요제에도 없었다. 서태지 역시 하나의 현상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현진영과 듀스, 그리고 유명한 김창환 사단을 필두로 한 새로운 주류음악의 흐름은 명백히 참신함에서도 가요제를 압도하고 있었다. 부족한 완성도에도 참신함으로 주류음악계에 어필하던 가요제는 이제 오히려 주류음악이 만든 흐름을 쫓아가면서 어설픈 완성도만이 드러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더이상 가요제를 찾아보지 않게 된 것이. 이후로도 몇 번 화제가 되는 입상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뿐. 그래도 독재정권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불모의 대중음악계에 끊임없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활력을 주었던 공로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좋은 노래들이 많다. 확실히 오래전 노래는 시적인 가사들이 많았다. 노래는 가사에서 멜로디로, 멜로디에서 사운드와 비트로 발전해 왔다. 가사가 멜로디에 먹히고 멜로디마저 비트와 사운드에 사로잡힌다. 아마 최근의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목마름이란 오래전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느꼈던 감동에 대한 갈증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며 감상할 수 있는 노래들이다. 심지어 시끄러운 록음악마저도. 물론 듣고 있으면 그 어설픔에 혀를 차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냥 생각났다. 유튜브는 좋다. 겨우 이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