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티 - 의심에 대한 믿음은 진실이 필요치 않다

까칠부 2018. 2. 17. 10:34

참여정부 당시 언론과 여론의 변화, 그리고 심지어 지지자들이 보이던 행태를 보면서 이런 말을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믿음은 진실보다 강하다.

의심은 믿음보다 강하다.

의심에 대한 믿음은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믿으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내가 보았다 믿으면 본 것이고, 들었다 믿었다면 들은 것이고, 있다고 믿는다면 있는 것이다. 이미 한 번 믿어 버리면 거짓말탐지기조차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의심이란 또한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지적 쾌락을 선사하는 마약과도 같은 유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 너머의 진실을 파헤친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을 오로지 자기 혼자만 꿰뚫고 있다. 자신을 비롯한 소수만이 독점한 비밀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자기 혼자만, 혹은 소수만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우월감과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더구나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놀라게 할 수 있다면 모두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안다. 나와 너만 안다. 우리들만 안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안다.


베테랑 형사 강기준(안내상 분)이 어째서 유능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경찰 내부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아직도 감을 앞세우는 시대착오적인 경찰이 실제로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감은 감일 뿐이다. 추리는 추리일 뿐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오로지 추리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물은 이미 시대에 뒤쳐진 장르가 된 지 오래되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범인을 잡는 것은 더 정확한 더 많은 증거와 증언들을 찾아내어 그를 통해 진실의 조각들을 맞추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시도와 노력들인 것이지 골방에서 굴리는 뇌의 주름은 아닌 것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사건을 짜맞추고 대충 앞뒤가 맞아떨어지니 그것을 사실이라 진실이라 믿어 버리고 만다. 그것을 실제 사실로, 진실로 만들기 위해 수사를 한다. 대개는 그것을 사실이라 진실이라 믿고 있기에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도 현실에 적지 않다. 심지어 고문을 하거나, 거짓말로 피의자를 속이거나, 아니면 드라마에서처럼 언론을 이용하기도 한다. 혐의입증이 어려운 경우 아예 여론재판에 맡김으로써 피의자를 궁지로 내몰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꼼수다. 아무리 정의감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더라도 그런 경찰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기준이 단지 경력만 많을 뿐 크게 실권 없는 팀장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경찰이라는 조직이 가진 합리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하긴 경찰만이 아니다. 대중 역시 마찬가지다. 들으며 웃었다. 


"내 친구의 사촌의 친구의 남편이 거기 스텝이었는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친구의 사촌도 대부분 모른다. 더구나 그 사촌의 친구의, 그것도 남편이라고 한다. 그것을 근거라 대고 있다. 같은 방송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일 자기가 보고 들었고 느꼈으며 그래서 했던 말들조차 아무렇지 않게 뒤집는다. 모두가 그렇게 몰아가는 분위기이니 어쩐지 그래야 하는 것 같아 그렇게 자기의 기억마저 믿음으로 바꾼다. 사이가 좋았어도 의심스러운 것이고 사이가 나빴어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결론은 무조건 의심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의심은 정당해야 하니까. 절대 옳아야 하니까.


관음이다. 그저 훔쳐만 보는 관음이 아니다. 제멋대로 상대의 알몸까지 상상하고는 품평을 한다. 있지도 않은 점에 흉터까지 만들어 흠을 잡는다. 더구나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써 남들보다 높은 곳까지 성공해서 올라갔기 때문이다. 정도를 넘어선 질시는 증오가 된다. 차라리 오대웅(이성욱 분)은 솔직하다. 이연정(이아현 분)에게도 고혜란(김남주 분)의 위기는 기회가 된다. 설사 그 기회가 자기의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고혜란이 몰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고혜란이 비참해지는 만큼 자기가 그를 굽어볼 수 있게 될 테니까. 내가 올라가지 못하면 상대를 끌어내리면 된다. 


대중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의 속성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강기준은 다른 언론이나 대중들과 그 동기만큼은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자기보다 잘난 누군가를 끌어내려 그 위에 서고픈 비틀린 욕망들을 채우고자 할 뿐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강태욱(지진희 분)에게 아버지(전국환 분)가 건넨 조언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확하다. 누구도 무엇이 진실인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은, 자기가 듣고 싶은, 자기가 믿고 싶은 사실들만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떠돌게 될 뿐이다. 그 실체도 없는 유령이야 말로 강태욱과 고혜란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인 것이다. 그 어디에 진짜 진실이 발붙일 수 있을까? 하필 여성이기에 정조와 관련된 추문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짓밟고 짓이겨 더럽힐 수 있는 요긴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긴 벌써 고혜란 자신도 한지원(진기주 분)을 상대로 같은 수단을 사용한 바 잇었다.


언론인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대중으로부터 신뢰받는 저명한 언론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뉴스나인의 앵커로 돌아왔을 때 스튜디오에서 그녀에게 보낸 갈채야 말로 그녀가 놓인 역설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 오로지 대중들에 진실과 정의만을 전달하겠다. 뉴스란 단지 팩트를 가지고 보여주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쇼에는 사실도 진실도 정의도 아닌 대중이 바라는 믿음과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뉴스를 오로지 선정적으로 소비하려는 언론 만큼이나 무책임한 대중이 있다. 진실은 의미없다. 남편인 강태욱마저 아내 고혜란의 진심을 한 점 의심없이 의심했던 것처럼.


그래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상투적이다. 진심이란 자존이다. 스스로 믿고 기대야 하는 단 하나 자신의 존재이며 존엄이다. 진심마저 저버렸을 때 고혜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은 무엇 때문에 고혜란과 결혼했을까? 지금껏 부부로서 함께 살아왔던 것일까? 이재영(고준 분)에게 그런 진심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에게 그 진심은 사랑이 되고 꿈이 되고 야망이 된다. 어쩌면 고혜란이 한지원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인지 모른다. 그녀가 지금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고 흔들리는 와중에도 당당해지려 하는 이유다. 어떤 경우도 어느 누구도 심지어 자신조차 자신을 상처입히거나 훼손할 수 없다.


진실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작가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복잡한 사정을 가진 유력인물 이재영이 어느날 갑자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과연 그냥 사고사였을까? 누군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를 죽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범인은 누구일까? 말하자면 누가 범인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보여주는 군상극이다. 하나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양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을 고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정말 하필 가장 신뢰받는 뉴스프로그램인 '뉴스룸'을 방영하고 있는 방송사라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미 진실은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당사자들에게만 진실이 중요할 뿐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조차 진실이라고 믿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할 뿐이다. 이 세상 어디에 온전한 진실이 남아 있을까?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에. 그러면 무엇이 남고 무엇으로 싸울까? 절실한 고민이다.